[탐방] “정읍에서 이팝나무 안 가꾸고는 우리가 못 살지”
-세월호 진상규명과 안전한 정읍을 위한 시민모임
글 은물
‘세월호 진상규명과 안전한 정읍을 위한 모임’(이하 세월호정읍시민모임)은 세월호참사가 일어난 2014년부터 함께 10년이라는 시간을 통과했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는를 추모하 고 진실이 밝혀지길 바라며 매주 동네 곳곳을 걷는 ‘3년 걷기’를 했다. 2주기 때는 천 명이 넘는 시민과 함께 세월호를 기억하고 진상규명이 되는 날까지 함께 하겠다는 뜻을 담아 ‘304그루 이팝나무 생명의 숲’(이하 이팝 생명의 숲)을 만들었다. 세월호정읍시민모임이 긴 시간 활발한 활동을 이어온 힘은 무엇이었을까. 내 질문에 ‘약속’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하겠다고 말해놓고 어떻게 안 해요
장은실 세월호참사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냥 직장 다니고 애 키우고 정치에 관심 없었어요. 저한테는 시민모임이 첫 사회 활동인 거예요. 시민모임에서 3년 걷기 할 때, 그리고 세월호 부모님들이 삼보일배하면서 행진할 때 부모님들께 끝까지 같이 하 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시민들하고 이팝나무 심을 때도 끝까지 활동한다고 약속했잖 아요. 저 자신과 한 약속인 것 같아요. 사실 힘들어 죽겠거든요. 근데 그래도 부모님들 하고 약속했고, 아이들하고 약속했잖아요. 그런 책임감이 깃들었죠. 정읍에서 이팝나 무 안 가꾸고는 우리가 못 살지. 우리랑 함께한 사람들한테 하겠다고 말해놓고 어떻 게 안 해요.
강윤희 저는 일단 모임 초기부터 있기도 했고, 팽목항에 갔을 때 만난 세월호참사 로 아이를 잃은 어머님이… (눈물이 고인다) 잠깐만요. 갑자기 감정이 올라오네… 어 머님이 마지막까지, 진실을 밝힐 때까지 싸울 거라고 얘기했어요. 저는 그 자리에서 끝까지 함께 가겠노라고 약속했어요. 부모님들은 끝까지 함께 갈 것이고, 그렇다면 누군가 그 옆에 함께 있어줘야 하잖아요. 제가 그 자리에 있고 싶었고, 약속을 지키고 싶었어요.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아요.
세월호정읍시민모임은 매월 셋째 주 월요일에 만난다. 모여서 별일 없어도 같이 밥을 먹고, 논의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회의하고, 어떤 활동을 하면 좋을지 이런저런 아이 디어를 내기도 한다. 구성원들이 3개월마다 돌아가면서 반장을 맡고, 그때그때 시간 이 되는 사람이 필요한 역할을 맡아서 일한다. 그렇게 오래 여러 활동을 함께 하면서 이 모임이 각자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됐을지 궁금했다.
홍지훈 이 모임이 저에게 위로가 되는 것 같아요. 모임 하는 날 회사에서 야근하느 라 못 간다고 하면 전화가 와요. 굶으면서 일하지 말고 잠깐 와서 밥 먹고 다시 일하러 가라고, 회의는 안 해도 괜찮다고. 근데 또 가서 밥만 싹 먹고 올 순 없잖아요. (웃음) 모임 갔다가 다시 회사 돌아와서 야근을 하더라도 ‘너무 잘 갔다 왔다’는 느낌을 주는 모임이에요.
박현주 초기에 시민모임을 만들기 위해서 애쓰고 열심히 활동했던 황미경이라는 분이 저처럼 귀농해서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어요. 사회활동도 계속하고. 그 양반은 차가 있고 나는 차가 없어요. 그러니까 그 양반이 계속 나를 태우고 다닌 거야. 활동하 다 보면 사람이 필요한 여러 일들이 있잖아요. 그럴 때 나한테 와서 그냥 참석만 해달 라고 해서 멋모르고 따라다닌 거예요. 그러다가 이 모임에 함께 하게 됐죠. 이제 이 모 임은 생활이 돼버렸어요.
강윤희 함께 가면 참 좋겠다 싶은 길을 이 사람들이 같이 걸어가 주고 있는 거잖아 요. 거기에 대해 든든함과 고마움이 늘 있어요.
내장산을 노랗게 물들인 100개의 현수막
함께 모임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냐고 묻자, 욕이 나올 만큼 추운 날 현주 님과 은실 님 둘이서 노란 현수막을 걸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세월호정읍시민모임은 초기 부터 지금까지 시민들에게 노란 현수막을 신청받아서 거리에 걸고 있다. 현수막에는 시 민들이 세월호참사에 대해서 전하고 싶은 말이 적혀있다. 이수환의 이름으로 걸린 노란 현수막에는 “가만히 기다리라는 말,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그 말도 함께 떠올릴 테지(박 일환 시(詩))”라는 시구(詩句)가 적혀 있고, 정읍노란리본공작소에서는 내건 현수막에 는 “생명안전 기본법 제정하라”라는 구호가 쓰여 있다. 내장산을 찾는 많은 사람이 노란 현수막을 보고 세월호를 기억해 주길 바라면서 내장산로를 따라 100개의 현수막을 걸 었다.
윤택근 현수막 거는 일은 반대 세력이 우리 거 못 걸게 하면서 더 열심히 하게 된 것 같아요. 현수막 보기 싫다고 민원 들어오니까 시에서 강제 철거해버린 적이 있어요. 철 거한 곳에 찾아가서 우리 거니까 내놓으라고 해서 또 걸고 그랬죠.
시민들에게 현수막을 신청받고, 현수막 제작을 의뢰하고, 현수막을 걸기 위해서 직접 끈을 달고, 현수막을 거리에 내걸고, 시에서 현수막을 강제철거하면 다 같이 찾아가서 우리 현수막 돌려달라고 싸워서 다시 달고, 낡으면 새로 바꾸고. 세월호를 기억하는 현 수막을 계속 달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사랑하는 이름을 함께 걸고
지훈 저는 가끔씩 혼자 이팝 생명의 숲에 와요. 이팝나무를 제 동생 이름으로 심었 거든요. 제 바로 밑에 동생이 2003년에 25살 됐을 때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나무 명패가 걸린 어린나무를 사진 찍어서 어머니께도 보여드렸어요.
저희와 활동을 함께하다가 먼저 간 분들이 있어요. 지금 모임에서 활동하는 김철, 이진 순 부부의 둘째 아들 상완이가 백혈병이었거든요. 상완이한테는 단원고 희생자들이 형 뻘 누나뻘이었어요. 몸이 아팠을 텐데도 가족끼리 와서 많이 활동했는데, 상완이가 중 학교 1학년 되는 나이에 먼저 갔어요. 이팝 생명의 숲에 상완이 나무를 소나무로 심어서 같이 있어요.
그리고 지금 이팝나무에 걸려있는 도자기 명패를 만든 신유경 선생님이라고 계세요. 손 재주가 뛰어나서 공예품 만드는 가게도 하셨거든요. 선하디선한 분이에요. 재능 기부도 많이 하셨고. 그분도 건강에 문제가 생겨서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제 인생에서 기억에 남는 죽음들이에요.
이팝 생명의 숲에 죽은 동생의 이름으로 나무를 심고,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을 기억하 면서 계속 나아가는 지훈 님의 마음이, 이제는 곁에 없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활동할 힘을 내는 세월호 운동과 닮아 보였다. 활동을 하는 동안 힘들거나 두려웠던 적은 없냐고 묻자 은실 님이 올해 10주기 행진 때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장은실 초기에 활동하면서 뭘 모를 때는 우리가 서명받고 열심히 하면 되겠다고 생각 했어요. 근데 요즘은 이렇게만 활동해서는 해결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10년이 지나니까 누가 어떻게 책임자들을 조사하고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정말 진상규 명이 될까 싶어서 막막해요. 저번에 10주기 행진 때 순범 엄마가 오셨는데, 조끼에다가 끝까지 함께 싸우겠다는 말을 쓰는데 떨렸다니까. 글씨는 쓰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정말 내가 계속 갈 수 있을까 두려움이 들었어요. 그래서 더욱더 마음을 다잡으려고 하죠. 이 팝 생명의 숲에 가서 나무들을 보면서.
실천하는 사람들이 지닌 힘
나는 은실 님이 떨면서도 순범 엄마가 입은 조끼에 “끝까지 함께 싸우겠습니다”를 쓰는 장면을 상상한다. 팽목항에서 세월호 어머니를 만났을 때를 회상하면서 눈물이 차오르던 윤희 님의 눈을 생각한다. “이팝 생명의 숲이 있어서 우리가 지금까지 할 수 있었다”던 시민모임 사람들의 말도 떠올려본다. 누군가는 세월호참사 이야기를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고 이야기하는데, 왜 누군가에겐 약속이 계속 활동을 할 힘이 되는지 궁금했 다. 그 답이 여기 있는 것 같다.
활동하면서 만났던 이들과 끝까지 싸우겠다고 약속했고, 숲을 잘 가꾸겠다고 말해버렸 으니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정읍시민모임 사람들의 모습에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구석 이 있다. 이제는 영영 그 사람들을 만나기 전의 나로는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모든 걸 그만둔다면, 약속한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자꾸만 밟힐 것이 다. 그 얼굴을, 그 약속을 저버릴 수 없으니 세월호정읍시민모임은 두렵고 힘들어도 계 속 활동해나갈 것이다. 이들이 지난 10년간 그랬던 것처럼.
세월호정읍시민모임과의 만남은 나에게 큰 힘이 됐다. 그건 약속을 기억하고 실천해나 가는 사람들이 가진 힘 덕분이다. 어디든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이 만남을 통 해 다시 알게 되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 같아서 회의적이고 싶은 순간에 세월호 정읍시민모임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면 쉽게 회의적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세월호정읍 시민모임에게서 받은 힘을 잘 간직해서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고 싶다.
[탐방] “정읍에서 이팝나무 안 가꾸고는 우리가 못 살지”
-세월호 진상규명과 안전한 정읍을 위한 시민모임
글 은물
‘세월호 진상규명과 안전한 정읍을 위한 모임’(이하 세월호정읍시민모임)은 세월호참사가 일어난 2014년부터 함께 10년이라는 시간을 통과했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는를 추모하 고 진실이 밝혀지길 바라며 매주 동네 곳곳을 걷는 ‘3년 걷기’를 했다. 2주기 때는 천 명이 넘는 시민과 함께 세월호를 기억하고 진상규명이 되는 날까지 함께 하겠다는 뜻을 담아 ‘304그루 이팝나무 생명의 숲’(이하 이팝 생명의 숲)을 만들었다. 세월호정읍시민모임이 긴 시간 활발한 활동을 이어온 힘은 무엇이었을까. 내 질문에 ‘약속’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하겠다고 말해놓고 어떻게 안 해요
장은실 세월호참사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냥 직장 다니고 애 키우고 정치에 관심 없었어요. 저한테는 시민모임이 첫 사회 활동인 거예요. 시민모임에서 3년 걷기 할 때, 그리고 세월호 부모님들이 삼보일배하면서 행진할 때 부모님들께 끝까지 같이 하 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시민들하고 이팝나무 심을 때도 끝까지 활동한다고 약속했잖 아요. 저 자신과 한 약속인 것 같아요. 사실 힘들어 죽겠거든요. 근데 그래도 부모님들 하고 약속했고, 아이들하고 약속했잖아요. 그런 책임감이 깃들었죠. 정읍에서 이팝나 무 안 가꾸고는 우리가 못 살지. 우리랑 함께한 사람들한테 하겠다고 말해놓고 어떻 게 안 해요.
강윤희 저는 일단 모임 초기부터 있기도 했고, 팽목항에 갔을 때 만난 세월호참사 로 아이를 잃은 어머님이… (눈물이 고인다) 잠깐만요. 갑자기 감정이 올라오네… 어 머님이 마지막까지, 진실을 밝힐 때까지 싸울 거라고 얘기했어요. 저는 그 자리에서 끝까지 함께 가겠노라고 약속했어요. 부모님들은 끝까지 함께 갈 것이고, 그렇다면 누군가 그 옆에 함께 있어줘야 하잖아요. 제가 그 자리에 있고 싶었고, 약속을 지키고 싶었어요.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아요.
세월호정읍시민모임은 매월 셋째 주 월요일에 만난다. 모여서 별일 없어도 같이 밥을 먹고, 논의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회의하고, 어떤 활동을 하면 좋을지 이런저런 아이 디어를 내기도 한다. 구성원들이 3개월마다 돌아가면서 반장을 맡고, 그때그때 시간 이 되는 사람이 필요한 역할을 맡아서 일한다. 그렇게 오래 여러 활동을 함께 하면서 이 모임이 각자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됐을지 궁금했다.
홍지훈 이 모임이 저에게 위로가 되는 것 같아요. 모임 하는 날 회사에서 야근하느 라 못 간다고 하면 전화가 와요. 굶으면서 일하지 말고 잠깐 와서 밥 먹고 다시 일하러 가라고, 회의는 안 해도 괜찮다고. 근데 또 가서 밥만 싹 먹고 올 순 없잖아요. (웃음) 모임 갔다가 다시 회사 돌아와서 야근을 하더라도 ‘너무 잘 갔다 왔다’는 느낌을 주는 모임이에요.
박현주 초기에 시민모임을 만들기 위해서 애쓰고 열심히 활동했던 황미경이라는 분이 저처럼 귀농해서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어요. 사회활동도 계속하고. 그 양반은 차가 있고 나는 차가 없어요. 그러니까 그 양반이 계속 나를 태우고 다닌 거야. 활동하 다 보면 사람이 필요한 여러 일들이 있잖아요. 그럴 때 나한테 와서 그냥 참석만 해달 라고 해서 멋모르고 따라다닌 거예요. 그러다가 이 모임에 함께 하게 됐죠. 이제 이 모 임은 생활이 돼버렸어요.
강윤희 함께 가면 참 좋겠다 싶은 길을 이 사람들이 같이 걸어가 주고 있는 거잖아 요. 거기에 대해 든든함과 고마움이 늘 있어요.
내장산을 노랗게 물들인 100개의 현수막
함께 모임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냐고 묻자, 욕이 나올 만큼 추운 날 현주 님과 은실 님 둘이서 노란 현수막을 걸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세월호정읍시민모임은 초기 부터 지금까지 시민들에게 노란 현수막을 신청받아서 거리에 걸고 있다. 현수막에는 시 민들이 세월호참사에 대해서 전하고 싶은 말이 적혀있다. 이수환의 이름으로 걸린 노란 현수막에는 “가만히 기다리라는 말,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그 말도 함께 떠올릴 테지(박 일환 시(詩))”라는 시구(詩句)가 적혀 있고, 정읍노란리본공작소에서는 내건 현수막에 는 “생명안전 기본법 제정하라”라는 구호가 쓰여 있다. 내장산을 찾는 많은 사람이 노란 현수막을 보고 세월호를 기억해 주길 바라면서 내장산로를 따라 100개의 현수막을 걸 었다.
윤택근 현수막 거는 일은 반대 세력이 우리 거 못 걸게 하면서 더 열심히 하게 된 것 같아요. 현수막 보기 싫다고 민원 들어오니까 시에서 강제 철거해버린 적이 있어요. 철 거한 곳에 찾아가서 우리 거니까 내놓으라고 해서 또 걸고 그랬죠.
시민들에게 현수막을 신청받고, 현수막 제작을 의뢰하고, 현수막을 걸기 위해서 직접 끈을 달고, 현수막을 거리에 내걸고, 시에서 현수막을 강제철거하면 다 같이 찾아가서 우리 현수막 돌려달라고 싸워서 다시 달고, 낡으면 새로 바꾸고. 세월호를 기억하는 현 수막을 계속 달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사랑하는 이름을 함께 걸고
지훈 저는 가끔씩 혼자 이팝 생명의 숲에 와요. 이팝나무를 제 동생 이름으로 심었 거든요. 제 바로 밑에 동생이 2003년에 25살 됐을 때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나무 명패가 걸린 어린나무를 사진 찍어서 어머니께도 보여드렸어요.
저희와 활동을 함께하다가 먼저 간 분들이 있어요. 지금 모임에서 활동하는 김철, 이진 순 부부의 둘째 아들 상완이가 백혈병이었거든요. 상완이한테는 단원고 희생자들이 형 뻘 누나뻘이었어요. 몸이 아팠을 텐데도 가족끼리 와서 많이 활동했는데, 상완이가 중 학교 1학년 되는 나이에 먼저 갔어요. 이팝 생명의 숲에 상완이 나무를 소나무로 심어서 같이 있어요.
그리고 지금 이팝나무에 걸려있는 도자기 명패를 만든 신유경 선생님이라고 계세요. 손 재주가 뛰어나서 공예품 만드는 가게도 하셨거든요. 선하디선한 분이에요. 재능 기부도 많이 하셨고. 그분도 건강에 문제가 생겨서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제 인생에서 기억에 남는 죽음들이에요.
이팝 생명의 숲에 죽은 동생의 이름으로 나무를 심고,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을 기억하 면서 계속 나아가는 지훈 님의 마음이, 이제는 곁에 없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활동할 힘을 내는 세월호 운동과 닮아 보였다. 활동을 하는 동안 힘들거나 두려웠던 적은 없냐고 묻자 은실 님이 올해 10주기 행진 때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장은실 초기에 활동하면서 뭘 모를 때는 우리가 서명받고 열심히 하면 되겠다고 생각 했어요. 근데 요즘은 이렇게만 활동해서는 해결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10년이 지나니까 누가 어떻게 책임자들을 조사하고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정말 진상규 명이 될까 싶어서 막막해요. 저번에 10주기 행진 때 순범 엄마가 오셨는데, 조끼에다가 끝까지 함께 싸우겠다는 말을 쓰는데 떨렸다니까. 글씨는 쓰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정말 내가 계속 갈 수 있을까 두려움이 들었어요. 그래서 더욱더 마음을 다잡으려고 하죠. 이 팝 생명의 숲에 가서 나무들을 보면서.
실천하는 사람들이 지닌 힘
나는 은실 님이 떨면서도 순범 엄마가 입은 조끼에 “끝까지 함께 싸우겠습니다”를 쓰는 장면을 상상한다. 팽목항에서 세월호 어머니를 만났을 때를 회상하면서 눈물이 차오르던 윤희 님의 눈을 생각한다. “이팝 생명의 숲이 있어서 우리가 지금까지 할 수 있었다”던 시민모임 사람들의 말도 떠올려본다. 누군가는 세월호참사 이야기를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고 이야기하는데, 왜 누군가에겐 약속이 계속 활동을 할 힘이 되는지 궁금했 다. 그 답이 여기 있는 것 같다.
활동하면서 만났던 이들과 끝까지 싸우겠다고 약속했고, 숲을 잘 가꾸겠다고 말해버렸 으니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정읍시민모임 사람들의 모습에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구석 이 있다. 이제는 영영 그 사람들을 만나기 전의 나로는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모든 걸 그만둔다면, 약속한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자꾸만 밟힐 것이 다. 그 얼굴을, 그 약속을 저버릴 수 없으니 세월호정읍시민모임은 두렵고 힘들어도 계 속 활동해나갈 것이다. 이들이 지난 10년간 그랬던 것처럼.
세월호정읍시민모임과의 만남은 나에게 큰 힘이 됐다. 그건 약속을 기억하고 실천해나 가는 사람들이 가진 힘 덕분이다. 어디든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이 만남을 통 해 다시 알게 되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 같아서 회의적이고 싶은 순간에 세월호 정읍시민모임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면 쉽게 회의적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세월호정읍 시민모임에게서 받은 힘을 잘 간직해서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