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기억공간 소개]바람이 감싸는 황토현 숲에 304그루의 생명을 심다
-정읍 ‘304그루 이팝나무 생명의 숲’
글 은물
참사의 기억이란 무엇일까. 세상에서 기억에 관해 흔히 쓰는 표현 중에 ‘눈에 보이지 않으 면 잊는다’는 말이 있다. 자꾸 접하지 않으면 휘발되고 마는 기억의 속성을 표현하고 있지 만, 누군가에게 어떤 기억은 절대 사라지지 않고 의식으로 불쑥불쑥 파고든다. 사회는 참 사의 기억을 쉽게 잊거나 지우려고 하지만, 참사의 피해자들은 그 기억에 사로잡힌 채 살 아간다. 이 아득히 먼 거리 사이에서 우리는 기억공간의 의미를 새로이 깨달았다.
세월호참사 이후 피해자와 시민들은 기억공간이 가야할 바에 대해 다시 물었다. 기억공간 은 기억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다. 그 기억은 고통과 슬픔에 찬 비명이자 이 비극을 초래한 사회에 대한 고발문이다. 이것을 쓰다듬고 대화하며 우리는 생명을 지키는 길을 고민한다.
참사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진 기념비는 참사를 지우는 힘의 증거이자 그 지우 기의 결과다. 그러므로 세월호참사 이후 기억투쟁은 참사의 현장을 지키는 일로부터 시작 됐다. 진도 팽목항에 세워진 기억관, 바닷속에서 끝끝내 인양해낸 세월호, 참사의 집중 피 해지역이자 희생자들의 삶이 어린 안산에 들어설 4.16생명안전공원이 그 대표적 사례다.
세월호참사의 기억공간은 여기에서 또 확장되었다. 투쟁의 중심지였던 광화문에 세워진 세월호 기억관(지금은 서울시의회 앞으로 옮겨진 후 광화문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 다)과 희생 학생들의 수학여행지에 세워진 세월호 제주기억관을 통해 우리는 참사의 ‘현 장’이 여러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배웠다. 그리고 또 하나, 노란리본 시민들이 전국 곳곳 에 자발적으로 세월호 기억공간을 조성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사월십육일 의약속」은 그렇게 자신의 삶터 가까운 곳에서 세월호를 품은 시민들이 만든 기억의 장소 를 돌아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전라북도 정읍시에 조성된 ‘304그루 이팝나무 생명의 숲’ 이야기다.
전라북도 정읍시에는 ‘세월호 진상규명과 안전한 정읍을 위한 시민모 임’(이하 세월호정읍시민모임)이 세월호참사를 기억하기 위해 시민들과 함께 만든 ‘304그루 이팝나무 생명의 숲’(이하 이팝 생명의 숲)이 있다. 이 팝 생명의 숲에 가기 위해 정읍역에서 세월호정읍시민모임에서 활동하는 장은실, 박현주 님과 만났다. 차를 타고 황토현 동학농민혁명기념탑 근처 에 있는 이팝 생명의 숲에 도착했다. 잠시 후 모임에서 활동하는 강윤희, 윤택근, 홍지훈 님이 차례로 도착했다. 다섯 사람과 함께 이팝 생명의 숲 을 걸었다.
4월에 피는 이팝꽃은 ‘영원한 사랑’
세월호를 기억하기 위한 공간으로 왜 숲을 만들었을까? 다들 “하다 보니 일이 커졌다”고 웃으며 말했다. 처음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한 그루의 추 모식수를 제안했다. 그러자 누군가 한 그루 심어서 뭘 하냐고 세월호 희생 자 수만큼 심자고 의견을 냈고, 그럼 어떤 나무를 어디에 심는 게 좋겠냐 는 이야기를 나눴다. 이팝나무를 심기로 하자, 농원을 가꾸는 최봉관 님이 8년 동안 키운 이팝나무를 몽땅 주겠다고 말했다. 곧바로 ‘달팽이 삽질단’ 이 만들어졌다. 묘목을 캐기 위해서다. 달팽이 삽질단이 그 이름에 담긴 의미대로 천천히 조심스럽게 캔 이팝나무를 함께 심을 사람들을 모집했 다. 304팀을 모집했는데, 천 명이 넘는 시민이 모였다. 팀마다 나무 한 그 루를 심고, 점심으로 소머리국밥을 끓여서 다 같이 나눠먹었다.
세월호를 추모하는 나무를 한 그루 심자는 이야기에서 시작해 숲을 만들 게 된 이야기가 참 멋있었다. 다섯 사람 모두 한결같이 “그때는 뭘 잘 몰라 서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웃으며 말했지만,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 이 모이지 않으면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이팝 생명의 숲을 소개하는 표지판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이팝나무를 심기로 한 건 이팝나무가 지닌 의미 때문이었다. 이팝나무의 꽃말은 ‘영원 한 사랑’이다. 봄이면 쌀밥 같은 하얀 꽃이 펴서 ‘생명의 나무’라고도 불린 다. 수명도 꽤 길어서 천년까지도 살 수 있다고 한다. “다 피지 못하고 가 버린 아이들이 다시 꽃으로 태어나길 바라면서” 이팝 생명의 숲을 만들었 다고 한다. 내가 숲을 찾았을 때는 여름이라 초록 잎이 무성했지만, 4월에 는 하얀 이팝꽃이 만개한다고 했다. 잔디가 있는 길을 두고 양옆에 이팝나 무가 늘어서 있었다.
길엔 원래 풀이 무성했는데, 내가 오기 전날 제초작업을 했단다. 농사를 지어서 제초작업에 익숙한 택근 님과 현주 님이 도왔고, 은실 님은 제초기 를 쓸 줄 몰라서 낫을 들고 수풀을 벴다고 한다. 지훈 님은 제초작업에 익
39숙하지 않아서 제초기를 들고 손을 덜덜 떨면서도 함께 했다. 그 풍경을 상상하니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맞이하기 위해서 더운 날 어렵게 시간을 맞춰서 수풀을 베는 마음이 감사했다. 내가 밟고 있는 길 이 누군가 정성 들여 가꿔둔 길이라는 걸 알게 되자 길이 새롭게 보였다.
숲길은 오르막길로 이어졌다. 나무 사이에 묶여있는 노란 리본이 바람 에 너풀너풀 흔들리고 있었다. 이팝나무에는 손바닥만 한 동그란 도자 기 명패가 걸려있다. 명패에는 희생자 이름, 이 나무를 심은 팀명, 나무 의 번호가 적혀 있고 노란 리본이 그려져 있다. 제일 첫 번째 명패 신청 자는 세월호 희생자 김유민 님의 가족이었다. 김유민 님의 나무는 김유 민 님의 가족이 직접 심었다. 원래 이 명패는 숲길에 있는 제일 첫 번째 나무에 걸려있었다. 나중에 유민 아빠가 요청해서 위쪽에 있는 나무로 옮겨 걸었다. 이팝 생명의 숲이 있는 근처에 유민 아빠가 나고 자란 마을 이 있는데, 그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나무로 명패를 옮겨서 걸고 싶다고 한 것이다. 마을에는 지금 유민 아빠의 가족이 살고 있다. 나무 옆에 서 서 그 마을을 바라보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꾼 숲
세월호정읍시민모임 사람들은 이팝 생명의 숲을 걷는 내내 숲을 어떻게 가꿀지 이런저런 논의를 했다. 은실 님이 가지치기를 하는 게 어떻냐고 물어보면 농사를 지어서 나무를 잘 아는 택근 님이 답했다.
“여기는 숲이니까 나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살아가도록 만들어줘야지. ”
노란 양산을 쓰고 걷던 윤희 님은 나무가 스트레스를 받을까 봐 나무를 감고 있는 넝쿨을 정리하고 있었고, 지훈 님은 뒤따라 걸으며 나무들이 잘 크고 있는지 살폈다. 현주 님은 숲길을 앞서서 걷고 있었다.
같은 날 심은 나무인데도 나무의 크기가 다 달랐다. 나무를 캐서 가지고 오는 과정에서 뿌리를 다친 나무들은 작게 자랄 수도 있다고 택근 님이 이야기했다. 중간에 죽는 나무들도 있어서 확인하고 1년에 10그루 정도 를 새로 심는다고 했다. 나무가 생각보다 잘 안 자라는 것 같다며 거름을 좀 줘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다.
이팝 생명의 숲을 시민들과 함께 만들고 달라진 점이 있는지 묻자, 택근 님이 답했다. “이팝 생명의 숲은 우리 함께하는 사람들의 자부심이죠.” 자부심이라는 말이 좋았다. 세월호참사를 기억하는 것뿐 아니라 곁에서 함께 싸우겠다는 마음을 숲에 담았던 과정이 자랑스럽고 당당하다는 이
40야기로 들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팝 생명의 숲을 가꿨지만 숲이 우리와 유가족, 그리고 시민들 사이의 관계를 가꿔주지 않았나 그런 생각도 들어요.”라고 윤희 님은 말했다. 어떤 장소를 만드는 일은 새로운 관계와 일을 도모할 수 있 는 시간이 펼쳐지는 일이기도 하다.
이팝 생명의 숲을 갔다가 차를 얻어타고 정읍역으로 돌아가던 길, 은실 님에게 이팝 생명의 숲에 자주 가 냐고 물었다.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그 주변에 갈 일이 있으면 꼭 들러요. 날씨가 좋은 날 숲에 가면 바 람이 굉장히 많이 부는데요. 숲이 있는 황토현이 굉장히 바람이 많은 곳이거든요. 제가 숲에 있는 단풍나 무 아래를 엄청 좋아하거든요. 바람을 막 맞으면서 숲을 둘러보면 명상하는 것 같아요.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가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오는 자리이기도 해요.”
이팝 생명의 숲에 자꾸만 마음이 가서 굳이 길을 돌아가는 마음을 헤아려봤다. 심란한 날, 숲에서 제일 좋아하는 단풍나무 아래에 앉아서 바람을 맞는 은실 님도 상상해 보았다. 숲을 걸었을 때는 바람이 많이 부는지 몰랐는데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오면서 숲에서 녹음한 파일을 켜보니 계속 바람 소리가 들렸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자리가 넓어질 때
세월호정읍시민모임은 앞으로도 무성하게 자라는 수풀을 몇 달에 한 번씩 제초작업을 하고, 거름도 주
며 나무들이 잘 자라고 있는지 살필 것이다. 나무가 죽으면 새로운 나무를 심고, 숲에 세월호를 기억하기 위해 걸어둔 현수막이 해지면 새 현수막을 달고, 명패가 떨어지거나 부서지면 다시 달고, 나무 사이에 묶 어놓은 노란리본이 낡으면 새로 갈아줄 것이다. 이런 수고를 해나가면서 이팝 생명의 숲을 가꾸는 일은 세월호를 기억할 자리를 세상에 만들어나가는 일이다.
나는 이팝 생명의 숲을 보며 나 혼자 기억하는 일을 넘어서 함께 기억할 공간을 가꾸는 일이 얼마나 아름 다운 일인지 배웠다. 세월호참사로 희생된 사람들을 나무로 기억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나무로 다시 태 어나길 바라는 일이기도 하다. 이팝 생명의 숲에 다녀오고 나서 세월호를 기억하는 자리가 넓어졌다. 넓 어진 곳엔 여러 생명이 사는 숲이 자리 잡았다. 이팝 생명의 숲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서 황토현에서 부 는 바람도 맞으면서 걷고 이팝나무도 살펴보고, 나무에 달린 명패도 하나하나 바라보면 좋겠다. 그렇게 이팝 생명의 숲이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아서 앞으로도 오래오래 그곳에 있길 바란다.
[4.16기억공간 소개]바람이 감싸는 황토현 숲에 304그루의 생명을 심다
-정읍 ‘304그루 이팝나무 생명의 숲’
글 은물
참사의 기억이란 무엇일까. 세상에서 기억에 관해 흔히 쓰는 표현 중에 ‘눈에 보이지 않으 면 잊는다’는 말이 있다. 자꾸 접하지 않으면 휘발되고 마는 기억의 속성을 표현하고 있지 만, 누군가에게 어떤 기억은 절대 사라지지 않고 의식으로 불쑥불쑥 파고든다. 사회는 참 사의 기억을 쉽게 잊거나 지우려고 하지만, 참사의 피해자들은 그 기억에 사로잡힌 채 살 아간다. 이 아득히 먼 거리 사이에서 우리는 기억공간의 의미를 새로이 깨달았다.
세월호참사 이후 피해자와 시민들은 기억공간이 가야할 바에 대해 다시 물었다. 기억공간 은 기억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다. 그 기억은 고통과 슬픔에 찬 비명이자 이 비극을 초래한 사회에 대한 고발문이다. 이것을 쓰다듬고 대화하며 우리는 생명을 지키는 길을 고민한다.
참사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진 기념비는 참사를 지우는 힘의 증거이자 그 지우 기의 결과다. 그러므로 세월호참사 이후 기억투쟁은 참사의 현장을 지키는 일로부터 시작 됐다. 진도 팽목항에 세워진 기억관, 바닷속에서 끝끝내 인양해낸 세월호, 참사의 집중 피 해지역이자 희생자들의 삶이 어린 안산에 들어설 4.16생명안전공원이 그 대표적 사례다.
세월호참사의 기억공간은 여기에서 또 확장되었다. 투쟁의 중심지였던 광화문에 세워진 세월호 기억관(지금은 서울시의회 앞으로 옮겨진 후 광화문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 다)과 희생 학생들의 수학여행지에 세워진 세월호 제주기억관을 통해 우리는 참사의 ‘현 장’이 여러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배웠다. 그리고 또 하나, 노란리본 시민들이 전국 곳곳 에 자발적으로 세월호 기억공간을 조성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사월십육일 의약속」은 그렇게 자신의 삶터 가까운 곳에서 세월호를 품은 시민들이 만든 기억의 장소 를 돌아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전라북도 정읍시에 조성된 ‘304그루 이팝나무 생명의 숲’ 이야기다.
전라북도 정읍시에는 ‘세월호 진상규명과 안전한 정읍을 위한 시민모 임’(이하 세월호정읍시민모임)이 세월호참사를 기억하기 위해 시민들과 함께 만든 ‘304그루 이팝나무 생명의 숲’(이하 이팝 생명의 숲)이 있다. 이 팝 생명의 숲에 가기 위해 정읍역에서 세월호정읍시민모임에서 활동하는 장은실, 박현주 님과 만났다. 차를 타고 황토현 동학농민혁명기념탑 근처 에 있는 이팝 생명의 숲에 도착했다. 잠시 후 모임에서 활동하는 강윤희, 윤택근, 홍지훈 님이 차례로 도착했다. 다섯 사람과 함께 이팝 생명의 숲 을 걸었다.
4월에 피는 이팝꽃은 ‘영원한 사랑’
세월호를 기억하기 위한 공간으로 왜 숲을 만들었을까? 다들 “하다 보니 일이 커졌다”고 웃으며 말했다. 처음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한 그루의 추 모식수를 제안했다. 그러자 누군가 한 그루 심어서 뭘 하냐고 세월호 희생 자 수만큼 심자고 의견을 냈고, 그럼 어떤 나무를 어디에 심는 게 좋겠냐 는 이야기를 나눴다. 이팝나무를 심기로 하자, 농원을 가꾸는 최봉관 님이 8년 동안 키운 이팝나무를 몽땅 주겠다고 말했다. 곧바로 ‘달팽이 삽질단’ 이 만들어졌다. 묘목을 캐기 위해서다. 달팽이 삽질단이 그 이름에 담긴 의미대로 천천히 조심스럽게 캔 이팝나무를 함께 심을 사람들을 모집했 다. 304팀을 모집했는데, 천 명이 넘는 시민이 모였다. 팀마다 나무 한 그 루를 심고, 점심으로 소머리국밥을 끓여서 다 같이 나눠먹었다.
세월호를 추모하는 나무를 한 그루 심자는 이야기에서 시작해 숲을 만들 게 된 이야기가 참 멋있었다. 다섯 사람 모두 한결같이 “그때는 뭘 잘 몰라 서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웃으며 말했지만,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 이 모이지 않으면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이팝 생명의 숲을 소개하는 표지판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이팝나무를 심기로 한 건 이팝나무가 지닌 의미 때문이었다. 이팝나무의 꽃말은 ‘영원 한 사랑’이다. 봄이면 쌀밥 같은 하얀 꽃이 펴서 ‘생명의 나무’라고도 불린 다. 수명도 꽤 길어서 천년까지도 살 수 있다고 한다. “다 피지 못하고 가 버린 아이들이 다시 꽃으로 태어나길 바라면서” 이팝 생명의 숲을 만들었 다고 한다. 내가 숲을 찾았을 때는 여름이라 초록 잎이 무성했지만, 4월에 는 하얀 이팝꽃이 만개한다고 했다. 잔디가 있는 길을 두고 양옆에 이팝나 무가 늘어서 있었다.
길엔 원래 풀이 무성했는데, 내가 오기 전날 제초작업을 했단다. 농사를 지어서 제초작업에 익숙한 택근 님과 현주 님이 도왔고, 은실 님은 제초기 를 쓸 줄 몰라서 낫을 들고 수풀을 벴다고 한다. 지훈 님은 제초작업에 익
39숙하지 않아서 제초기를 들고 손을 덜덜 떨면서도 함께 했다. 그 풍경을 상상하니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맞이하기 위해서 더운 날 어렵게 시간을 맞춰서 수풀을 베는 마음이 감사했다. 내가 밟고 있는 길 이 누군가 정성 들여 가꿔둔 길이라는 걸 알게 되자 길이 새롭게 보였다.
숲길은 오르막길로 이어졌다. 나무 사이에 묶여있는 노란 리본이 바람 에 너풀너풀 흔들리고 있었다. 이팝나무에는 손바닥만 한 동그란 도자 기 명패가 걸려있다. 명패에는 희생자 이름, 이 나무를 심은 팀명, 나무 의 번호가 적혀 있고 노란 리본이 그려져 있다. 제일 첫 번째 명패 신청 자는 세월호 희생자 김유민 님의 가족이었다. 김유민 님의 나무는 김유 민 님의 가족이 직접 심었다. 원래 이 명패는 숲길에 있는 제일 첫 번째 나무에 걸려있었다. 나중에 유민 아빠가 요청해서 위쪽에 있는 나무로 옮겨 걸었다. 이팝 생명의 숲이 있는 근처에 유민 아빠가 나고 자란 마을 이 있는데, 그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나무로 명패를 옮겨서 걸고 싶다고 한 것이다. 마을에는 지금 유민 아빠의 가족이 살고 있다. 나무 옆에 서 서 그 마을을 바라보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꾼 숲
세월호정읍시민모임 사람들은 이팝 생명의 숲을 걷는 내내 숲을 어떻게 가꿀지 이런저런 논의를 했다. 은실 님이 가지치기를 하는 게 어떻냐고 물어보면 농사를 지어서 나무를 잘 아는 택근 님이 답했다.
“여기는 숲이니까 나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살아가도록 만들어줘야지. ”
노란 양산을 쓰고 걷던 윤희 님은 나무가 스트레스를 받을까 봐 나무를 감고 있는 넝쿨을 정리하고 있었고, 지훈 님은 뒤따라 걸으며 나무들이 잘 크고 있는지 살폈다. 현주 님은 숲길을 앞서서 걷고 있었다.
같은 날 심은 나무인데도 나무의 크기가 다 달랐다. 나무를 캐서 가지고 오는 과정에서 뿌리를 다친 나무들은 작게 자랄 수도 있다고 택근 님이 이야기했다. 중간에 죽는 나무들도 있어서 확인하고 1년에 10그루 정도 를 새로 심는다고 했다. 나무가 생각보다 잘 안 자라는 것 같다며 거름을 좀 줘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다.
이팝 생명의 숲을 시민들과 함께 만들고 달라진 점이 있는지 묻자, 택근 님이 답했다. “이팝 생명의 숲은 우리 함께하는 사람들의 자부심이죠.” 자부심이라는 말이 좋았다. 세월호참사를 기억하는 것뿐 아니라 곁에서 함께 싸우겠다는 마음을 숲에 담았던 과정이 자랑스럽고 당당하다는 이
40야기로 들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팝 생명의 숲을 가꿨지만 숲이 우리와 유가족, 그리고 시민들 사이의 관계를 가꿔주지 않았나 그런 생각도 들어요.”라고 윤희 님은 말했다. 어떤 장소를 만드는 일은 새로운 관계와 일을 도모할 수 있 는 시간이 펼쳐지는 일이기도 하다.
이팝 생명의 숲을 갔다가 차를 얻어타고 정읍역으로 돌아가던 길, 은실 님에게 이팝 생명의 숲에 자주 가 냐고 물었다.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그 주변에 갈 일이 있으면 꼭 들러요. 날씨가 좋은 날 숲에 가면 바 람이 굉장히 많이 부는데요. 숲이 있는 황토현이 굉장히 바람이 많은 곳이거든요. 제가 숲에 있는 단풍나 무 아래를 엄청 좋아하거든요. 바람을 막 맞으면서 숲을 둘러보면 명상하는 것 같아요.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가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오는 자리이기도 해요.”
이팝 생명의 숲에 자꾸만 마음이 가서 굳이 길을 돌아가는 마음을 헤아려봤다. 심란한 날, 숲에서 제일 좋아하는 단풍나무 아래에 앉아서 바람을 맞는 은실 님도 상상해 보았다. 숲을 걸었을 때는 바람이 많이 부는지 몰랐는데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오면서 숲에서 녹음한 파일을 켜보니 계속 바람 소리가 들렸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자리가 넓어질 때
세월호정읍시민모임은 앞으로도 무성하게 자라는 수풀을 몇 달에 한 번씩 제초작업을 하고, 거름도 주
며 나무들이 잘 자라고 있는지 살필 것이다. 나무가 죽으면 새로운 나무를 심고, 숲에 세월호를 기억하기 위해 걸어둔 현수막이 해지면 새 현수막을 달고, 명패가 떨어지거나 부서지면 다시 달고, 나무 사이에 묶 어놓은 노란리본이 낡으면 새로 갈아줄 것이다. 이런 수고를 해나가면서 이팝 생명의 숲을 가꾸는 일은 세월호를 기억할 자리를 세상에 만들어나가는 일이다.
나는 이팝 생명의 숲을 보며 나 혼자 기억하는 일을 넘어서 함께 기억할 공간을 가꾸는 일이 얼마나 아름 다운 일인지 배웠다. 세월호참사로 희생된 사람들을 나무로 기억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나무로 다시 태 어나길 바라는 일이기도 하다. 이팝 생명의 숲에 다녀오고 나서 세월호를 기억하는 자리가 넓어졌다. 넓 어진 곳엔 여러 생명이 사는 숲이 자리 잡았다. 이팝 생명의 숲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서 황토현에서 부 는 바람도 맞으면서 걷고 이팝나무도 살펴보고, 나무에 달린 명패도 하나하나 바라보면 좋겠다. 그렇게 이팝 생명의 숲이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아서 앞으로도 오래오래 그곳에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