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십육일의약속[인터뷰]“보여줄 수 없는 고통을 보이게 하는 게 이야기의 역할이죠” 배우 박원상

“보여줄 수 없는 고통을  보이게 하는 게  이야기의 역할이죠”-배우 박원상

글  박희정

 영화 스틸 컷

▲영화 스틸 컷연분홍프로덕션

<목화솜 피는 날>은 세월호참사 10년 후를 그린 장 편 극영화다. 한 가족을 중심으로 참사 이후를 살아 가는 유가족의 아픔을 생생히 드러낸다. 목화의 두 번째 꽃으로 불리는 목화솜처럼, 참사로 희생된 아이들이 다시 태어나 새 삶을 살기 바란다는 염원을 영화 제목에 담았다.


드라마 <녹두꽃>, <육룡이 나르샤> 등을 연출한 신경수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연극 <아들에게>, <말 뫼의 눈물> 등 사회 속 약자들의 이야기를 써온 구 두리 작가가 각본을 맡았다.


이 작품은 참사의 현장이자 증거인 세월호 안에서 처음 촬영한 영화로 화제가 되었다. 이러한 시도가 가능했던 건 피해자들의 참여로 영화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목화솜 피는 날>은 인권운동단체이자 다큐멘터리 제작 집단인 연분홍치마가 설립한 '연분홍프로덕션'과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가 함께 기획한 10주기 영화 프로젝트 '봄이 온다' 중 한 편이다. 4.16가족극단 '노란리본' 어머니들이 배우로도 참여했다.


<목화솜 피는 날>의 주연으로, 딸을 잃은 아버지 '병호'를 연기한 박원상 배우를 지난 7월 한빛미디노동인권센터에서 만났다. 박원상은 1994년부터 연극과 뮤지컬, 영화, 드라마를 오가며 100편이 훌쩍 넘는 작품에 출연한 베테랑 배우다. 2004년 <범죄의 재구성>으로 얼굴을 널리 알리기 시작했으며 <남영동1985>에서 고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을 모델로 한 고문 피해자 역을 맡아 열연했다. 순한 얼굴부터 악역까지 연기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로 알려져 있다.


"책임 떠 넘기지 않으려 출연 결심"


 영화 스틸 컷

▲영화 스틸 컷연분홍프로덕션

- <목화솜 피는 날>은 세월호참사 피해자의 아픔을 담아낸 영화입니다. 연기를 오래 해온 배우에게도 쉬운 도전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출연을 결정하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배우는 누군가가 나를 먼저 선택해 준 후에야 비로소 내 선택의 시간을 마주하게 돼요. <목화솜 피는 날>도 마찬가지였어요. 출연 제의가 와서 대본을 읽고 출연하게 된 거죠. 과정은 다른 작품을 할 때와 같은데 결정이 그리 간단하지는 않았어요. 아픔의 덩어리가 너무 크잖아요. 내가 그걸 '표현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감당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어요. 참사 후 10년이 지나서 만드는 극영화인데, 그저 만든 것에만 의미를 둔 작품이어서는 안 되잖아요. 그래서 엄두가 안 났지만, 쉽사리 밀어내지도 못하겠더라고요. 처음에는 '나보다 더 잘할 사람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한편으로는 그런 태도가 자칫 책임을 떠넘겨버리는 일이 되는 건 아닐까 고민도 됐죠.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보기로 했어요. 첫 대본 리딩에서 다른 배우들을 만났는데, 그 마음이 저와 다르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이 영화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 '병호'는 딸을 잃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아픔에 빠져 있어요. 같은 유가족이나 주변의 시민들과도 갈등하고요. 배우로서 '병호'라는 인물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어땠나요.

"흔히 배우의 연기를 일컬어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산다'고 하잖아요. '변신'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고. 그런데 저는 그런 말에 그다지 공감하지 않아요. 배우는 '흉내 내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하는 일을 비하하는 게 아니라, 어떤 인물을 표현하는 일은 늘 제게 벅차다는 뜻이에요. 저는 늘 대본에 답이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이 작품은 대본 바깥에서 제가 답을 구할 수도 없는 텍스트였어요. 어떻게 자식 잃은 부모의 마음을 제가 다 이해하고 공감해서 표현할 수 있겠어요. 저는 자식을 잃어본 적도 없고, 그분들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도 없어요. 기껏해야 담 너머로 보고 느낀 사람인 거죠. 그러니 일단은 대본에 집중했어요. 인물의 상황과 감정을 최대한 이해하려고 애쓰고, 촬영에 들어갈 땐 머리를 내려놓고 갔죠."


- 영화 개봉하고 관객들에게 어떤 질문을 가장 많이 받으셨어요?

"아무래도 (영화 속에서) 세월호에 들어갔을 때 어땠는지 가장 많이 물어보세요.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은데, 딱히 제가 드릴 수 있는 답은 없더라고요. 세월호 선내에서 촬영할 때는 아주 적은 시간 동안 집중해서 찍어야 했어요. 그날 비가 많이 와서 바닥이 진창인 데다 위험한 구역도 있어서 이동에도 주의가 필요했고요. 되도록 개인적인 감정에 사로잡혀있지 않으려 했거든요.


오히려 에필로그 신 찍을 때가 기억에 남아요. 제가 세월호에 참관 온 고등학생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설명해 주는 장면이거든요. 선체를 바깥에서 풀샷으로 찍을 때는 저도 멍하니 세월호를 바라보게 되더라고요. 배에 붙은 따개비나 녹슨 철판 같은 것을요. 세월호 선체를 잘 보존해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라도 사람들이 배 안에 들어갈 수 있게 했으면 좋겠어요. 눈에 안 보이면 당연히 기억도 흐려지잖아요. 세월호참사 당시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는 이 참사가 그냥 어른들에게 전해 듣는 얘기일 거 아니에요. 마치 저한테 6.25나 4.19가 그랬던 것처럼."


말 대신 몸으로


 영화 스틸 컷

▲영화 스틸 컷연분홍프로덕션

극 중에서 병호의 트라우마는 말 대신 몸으로 표현된다. 병호는 느닷없이 달리고 이명과 두통에 시달리고 벌컥 화를 내며 기억을 자꾸 잃는다. 그 모든 일에 지친 듯 병 호는 세월호 선체 안에 망연자실 누워 허공을 바라본다. 그는 참사를 일으킨 이 사회가 가한 고통에 무너진 듯 보이고, 한편으로는 참사로 세상을 떠난 딸의 마음을 온몸으로 느껴보려는 듯도 보인다. 그런 병호의 얼굴을 딸의 손이 다정히 쓰다듬는다. 병호를 무너뜨린 고통은 병호가 싸우는 이유이기도 하다.


- 세월호 안에서의 촬영은 그 현장을 몸으로 느끼는 일이기도 하잖아요. 보는 나도 힘든데 연기하는 사람은 얼마나 힘들까 싶었어요.

"쉽지는 않죠. 신(scene)을 준비하면서는 생각을 많이 해요.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여러 가지로 고민하죠. 현장에 가면 그 생각을 다 잊어야 해요. 머리가 발동하면 연기가 곤란해져요. 그날 연기할 때는 몰랐는데, 끝내고 보니 동수 아버지가 제 연기를 지켜보고 계셨더라고요. 선내 촬영이다 보니 해수부 직원이 동행해야 해서 동수 아버지도 같이 계셨던 거였어요. 모니터 감독 옆에서 촬영된 영상을 보시다가 못 보겠다고 괴로워하시더라고요."


- 가족협의회에서 시사회를 할 때 가족들 표정을 봤는데, 다들 괴로운 얼굴이셨어요. 트라우마가 생생히 표현된 장면들을 보는 게 힘드시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시 사회가 끝나고 몇 분께 여쭤보니 오히려 본인들의 고통 이 잘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이 영화를 호평하시더라고요.

"어떤 마음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상처가 어떻게 없어지겠어요. 시간이 흘러도 바로 어제 일 같이 느껴지는 날들일 텐데. 잊지 않고 고스란히 그 현실을 감당한다는 게 어떤 건지 저는 당사자가 아니니까 다 알 수는 없죠. <목화솜 피는 날> 시사회에 세월호 어머님들이 와서 보시고 "뼈마디가 끊어지는 것처럼 아팠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아파도 외면하는 게 아니라 그걸 마주해야 하는 일로 받아들이시잖아요. 굉장히 강인한 모습이라 생각해요. 그러니 이렇게 버텨오실 수 있었겠지요. 그 모습을 보면서 다른 분들도 힘을 얻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참사 이후 그 긴 시간 싸워온 점에 대해 가족들도 자부심을 느끼실 거예요. 한편으로 여전히 내 안에 엄청난 고통이 있는데 10주기쯤 되니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고통의 존재가 희미해져 가는 게 아닐까 불안한 마음도 있지 않았을까요. 남에게 꺼내 보여줄 수 없는 고통을 이 영화가 생생히 보여주고 있어서 가족들에게 큰 의미가 있었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게 이야기의 역할인 것 같아요. 아직도 창작자들한테 2014년 4월 16일 그날의 이야기가 풀어내기 간단한 소재일 수가 없거든요. 어쩌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어요. <너와 나>를 찍은 조현철이라는 후 배가 아주 내성적인 친구예요. 같이 드라마 찍으면서 처음 만났는데, '이 친구 뭐지?' 싶은 구석이 있었어요. 드라마 끝나고는 개인적인 연락을 한 번도 안 했는데, 어느 날 전화가 오더니 "선배님 대본 하나 보내드릴 건데 좀 해주십시오" 그러는 거예요. 자기가 2014년 4월 16 일부터 계속 반복적으로 꾸는 꿈이 있는데 그걸 이야기로 풀지 않으면 안 되겠더래요. 그게 <너와 나>였고 거기서도 제가 아버지 역할을 했죠. <너와 나>는 조현철이니까 만들어낼 수 있었던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또 5년 10년이 지나면 세월호참사에 대한 세상의 기억이 더 옅어지겠죠. 그럴 때 또 다른 시선의 2014년 4월 16일의 이야기들이 분명히 나올 거로 생각해요. < 목화솜 피는 날>이라는 영화가 세월호 이야기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싶은 생각을 하던 분들한테 어떤 기점의 역할은 해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여러 현장을 경험하셨잖아요. 그런데도 좀 새로운 현장이었을 것 같아요. 피해자들이 함께 기획한 프로젝트이고 4.16가족극단 '노란리본' 어머니들이 직접 배우로도 참여하셨고요.

"유가족들이 영화에 함께 참여해 주셨기 때문에 영화가 더 힘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래도 표현에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잖아요. 우리끼리였다면 주저하고 답도 못 찾고 고민만 하다 시간을 버렸을지도 모르는데, 그분들이 나서주셨기 때문에 그 힘을 받아서 앞으로 갈 수 있었죠. 그 힘이 진짜 컸어요.


노란리본 극단이 대학로 혜화동 1번지에서 공연할 때 <목화솜 피는 날>에 함께 출연한 우미화 배우랑 최덕문 배우와 같이 보러 갔어요.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무대 위에서 흠결 없는 연기와 매끄러운 주고받기를 보여주는 게 그분들의 목표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기성 극단에서 할 수 없는 아주 분명한 에너지가 어머님들한테는 있어요. 공연 끝나고 저희가 대학로 연극 선배 입장에서 대학로에서 공연한 분들이라면 '림스치킨'에서 김치 쫄면은 드셔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모시고 갔죠. 맛있게 드시더라고요. 뿌듯했어요. (웃음)영화 출연이 인연이 되어서 단원FM(안산 공동체라디오)에 도 출연했어요. 윤희 어머니와 은정 어머니 두 분이 라디오 디제이를 하시는데, 잘하시더라고요. 원고도 잘 쓰시고. 이 방송도 노란리본 극단처럼 조금 더 시간이 쌓이면 아주 분명한 자리를 만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라디오 녹음이 끝나고 나오는데 선물을 주시는 거예요.


4.16목공방에서 만든 고양이 발 모양의 등긁개더라고요. 아내가 너무 좋아했어요. 네가 받아온 선물 중에 가장 좋다고. (웃음) 너무 좋았어요. 저나 집사람이나 등긁개 가 너무 필요해서 잘 쓰고 있습니다."


- 마지막 질문입니다. 이 영화가 배우님께는 무엇을 남겼나요?

"<목화솜 피는 날>이라는 작품이 저에게 들어왔고, '병호'라는 역할을 직업 배우로서 수행했어요. 제가 여타 드라마나 영화에서 했던 작업하고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아요. 근데 다른 작품들은 시간이 지나면 휘발이 돼요. 때로 몇 년이 지나면 내가 그걸 했었는지도 가물가물해지기도 해요. 왜냐하면 계속 다른 작품들로 그 기억이 덮여가니까. 그런데 <목화솜 피는 날>은 오래오래 제 기억에 또렷이 남는 작품이 될 거예요. 앞으로 또 어떤 작품을 만나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는 제가 각 별히 기억하는 작품 중 제일 앞에 놓여 있어요. 세월호 참사로부터 10년이 지나서, 제가 배우로서 이런 인연을 만났는데, 시간이 지나서 만약에 이런 인연이 저한테 또다시 온다면… 그때도 잠깐 고민하고 또 하게 되지 않을까요. (웃음)"


"제가 서 있는 곳은 단원고 남학생들이 있던 객실입니다. 이 방에 열 여섯 명이 있었어요. 다 엉켜서. 잠수사들이 풀어지지 않는 학생들을 보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엄마 보러 가야지' 아이들의 핸드폰에 가장 많이 남아있던 영상이 당시 갑판 위 불꽃놀이 영상이었어요. 이곳에서, 마지막 밤이었죠. 시간이 지나더라도, 꼭 기억해 주세요" - <목화솜 피는 날> 병호의 대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