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참사를 만나다]이태원 참사 특조위, 구조적 부정의와 공동체의 책임 묻기를
-10.29 이태원 참사 2주기
글 랑희(인권운동공간 활 상임활동가)
2024년 10월 29일은 이태원 참사 2주기다. 올해 5월 2일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통과되면서, 현재 참사의 진상을 규명할 특별조사위원회의 설립이 준비되고 있다. 이태원 참사가 일어나고 사흘 뒤 경찰은 특별수사본부를 꾸렸다. 74일에 걸친 수사는 경찰·구청·소방·교통 관계자 등 23명을 검찰에 송치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재난안전 관련 주무부처나 상급기관의 수장들은 수사 대상에 올리지도 못해 비난받았다. 뒤이어 열린 국정조사 특별위원회는 시작부터 파행이었다. 55일간의 조사 후 대통령실 등의 책임과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파면 요구를 담은 결과보고서를 채택했지만, 국민의힘 의원들은 해당 내용에 반발해 퇴장해버린 채였다.이러한 상황에서 피해자들은 간절한 염원으로 특별조사기구의 활동을 일궈냈다.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상황에서 이태원 참사의 진실을 규명한다는 것이 지니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필자 랑희 활동가는 4.16연대 운영위원이자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진상규명시민참여위원으로 활동했다. |
2024년 7월 27일, 뜨거운 공기를 가르며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서울역까지 걸었다. 쏟아지는 비에도 아스팔트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비가 멈추면 도로는 머금은 물기와 함께 열기를 다시 토해냈다. 내가 "물속에 있는 거 같아"라고 말하자 동료는 "사우나에 갇힌 것 같아"라고 대꾸했다.
행진 대열 맨 앞에는 영정을 든 아리셀 참사 희생자 가족들이 섰다. 사랑하는 이의 얼굴은 가슴에 꼭 안았지만,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은 가슴에 담기에 너무 커 보였다. 참사의 책임자들이 마음을 다해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다면 그 슬픔이 조금은 덜어지지 않았을까. 그런데 에스코넥·아리셀은 사과는커녕 형사처벌을 면하겠다고 가족들과 개별적으로 합의를 시도했다. 관리감독의 책임이 있는 화성시청은 장례도 치르지 못한 유가족들에 대해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나섰다. 게다가 위로의 말을 골라도 부족할 때 혐오의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사람들까지 있다. 유가족의 슬픔은 분노와 함께 눈물로 흘렀다.
도시를 가득 채운 습기보다 더 숨 막히는 일들을 34일간 버텨 온 유가족들이 파란 리본을 만들어 행진 참가자들에게 나눠주었다. 먼저 떠난 사랑하는 이가 파란 하늘에서 지켜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조그만 리본에 꾹꾹 눌러 담았을 그 마음을 생각하며 가방에 걸려있는 노란 리본과 보라 리본 옆에 매달았다.
걸음을 옮기면서 '이 길을 이렇게 또 걷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2월, 이태원 참사 100일을 앞두고 영정 뒤를 따라 이 길을 걸었다. 그리고 1주기였던 지난 10월에도 걸었고, 눈발이 날리던 올해 1월에는 '이태원 참사 특별법' 공포를 촉구하며 다시 영정을 안고 시청광장 분향소에서 대통령실을 향해 걸었다. 그렇게 피해자들이 걷고 울고 외치면서, 때로는 소리를 삼키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곡기를 끊으며 19개월의 시간을 온몸으로 견디어 간신히 '10·29 이태원참사 피해자 권리 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법'을 만들어냈다.
그런 정치는 없었다
이태원 참사 특별법 제정 후, 정치권에서 들려온 자평을 들으며 부아가 났다. 대통령 거부권 행사 이후 여야가 서로 '양보'해 합의에 이르렀다거나 대통령실 대변인의 "협치의 첫 성과"라는 식의 말이라니.
체감온도 영하 20도가 넘는 혹한에서 밤새도록 1만 5900번의 절을 하는 간절한 마음을 외면했던 대통령과 여당이었다. 합의를 호소하고 눈물을 삼키며 법안을 양보한 유가족들을 지우고 정치인과 대통령의 결단이나 노력으로 이뤄진 것처럼 내놓는 말들이 듣기 싫었다.
여당과 일부 언론은 이태원 참사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두고 참사 초기부터 이때까지 끈질기게 참사를 '정치화/ 정쟁화'한다며 비난했다. '진상규명은 이미 충분하고 특별법도 불필요하다'는 것이 비난의 요지다. 그래서 세월호참사를 소환 하기도 했고, 때로는 유가족을 위하는 양 훈계를 하기도 하고, 사회적 비용을 계산하며 갈등이 벌어질 사회를 걱정하는 체 하기도 했다. 말을 내놓음으로써 일어나지 않을, 또는 일어나 지 않아야 할 일이 발생하는 효과를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정치적 효과'라 할 수 있지 않겠나.
유가족을 위한다면 유가족의 말을 경청하고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할 국가의 역할을 찾아야 할 것이고, 사회적 갈등이 걱정 된다면 어떻게 함께 해결해 나갈지 대안을 만들고 슬픔을 함 께하는 공동체의 마음과 태도를 제안하면 될 일이다. 그런 정 치는 없었다. 국가의 책무를 피하기 위한 정략적인 말만 있었 을 뿐이다.
진상을 규명하고, 재발을 방지하는 대책을 마련하며, 책임을 묻는 것은 참사 피해자의 권리이고 정치·사회 공동체의 의무 이다. 나는 공동체의 의무를 다하는 정치, 피해자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정치, 안전사회로의 전환을 추진하는 정치를 원한다. 그런 정치가 가능하기 위해서 사회적 참사에 대한 정치적 책임, 공동체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진상규명이 필요하다.
진상규명, 시스템의 작동과 국가의 책임까지
이태원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의 요구가 '정쟁화'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국정조사와 수사가 이미 이뤄졌고 책임자에 대한 재판이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사법 절차와 처벌'을 '진상규명'과 동일한 것으로 만들면서 진상규명의 의미를 왜곡하고 오해하게 한다.
진상규명은 2022년 10월 29일 그날의 사실을 찾는데 그치지 않는다. 진상규명은 '무슨 일이 왜, 어떤 문제로 일어났는가'를 밝히는 과정으로, 재난이 발생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또한 생명권을 침해받은 피해자들에게 충분한 지원과 배상 등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 역시 국가의 의무이기에, 재난 이후의 시간을 포함한다.
재난을 예방하기 위한 계획과 실행, 그리고 재난에 대응하고 회복하기까지의 과정은 개인(들)과 시스템이 얽혀 작동한다. 역할이 분배된 기관들끼리 맞물려 돌아가는 통합적인 작용이다. 이 움직임을 개별적으로 쪼개어 매뉴얼과 법령 위반 여부만을 따지게 되면, 시스템의 작동을 포착하는 시선이 희미해질 수 있다.
개별 행위자가 기존의 법령과 규칙과 매뉴얼을 어떻게 위반했는지 밝히는 것은 꼭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책임자들의 역할을 확인하는 것, 이것이 '법적 책임'을 밝히는 과정과는 다른 '구조적 원인 규명'의 의미이고, 우리가 이태원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에 기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상규명은 누구의 책임인가와 함께 국가의 책임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대사회에서의 재난은 이미 사회구조적인 문제이며 그에 대한 국가의 책무는 너무도 당연한 국가의 존재 이유로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재난은 '불운'이 아니라 '부정의'의 문제가 된다. 제도, 관행, 사회적 규범과 가치, 체제 등이 재난에 취약한 계층과 사회 부분을 만들어내고 그들에게 피해를 부정의하게 배분하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부정의를 만들고 유지하게 한 사회·정치·경제적 요인이 어디에 있으며 그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밝혀낼 필요가 있다. 부정의의 책임을 확인해야 재발방지 대책도 제대로 세울 수 있다. 이 부정의의 인정으로부터 피해자의 회복이 시작되고 공동체는 안전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전환이 가능해진다.
행정의 실패, 면죄부 줄 수 없다
우리가 국가에 기대하는 것은 생명과 안전이 위험에 처했을 때 최선을 다해 대응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다. 만약 재난 대응에 실패했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책임지기를 바란다. 그 기대는 늘 무너져 피해자들이 '국가는 없었다'는 절규를 반복하게 했다. 위험에 대비하지 않았고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던 재난 행정이 참사를 만들었는데, 행정안전부 장관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재판정에 선 용산구청장은 권한이 없는데 '적극 행정'을 하지 않은 것은 위법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서울경찰청장은 참사를 전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무죄라는 항변을 했다.
국가의 역할을 맡았던 정부 기관을 이끄는 수장들의 무능이 만든 재난 행정의 실패에 대해 책임을 묻기 위해서 진상규명은 반드시 필요하다. '몰랐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라는 핑계가 더 이상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법적 책임뿐 만 아니라 사회구조적 부정의의 책임을 확정하고 이에 대해 처벌하는 것 역시 생명권을 보호하는 국가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다른 참사를 만나다]이태원 참사 특조위, 구조적 부정의와 공동체의 책임 묻기를
-10.29 이태원 참사 2주기
글 랑희(인권운동공간 활 상임활동가)
2024년 7월 27일, 뜨거운 공기를 가르며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서울역까지 걸었다. 쏟아지는 비에도 아스팔트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비가 멈추면 도로는 머금은 물기와 함께 열기를 다시 토해냈다. 내가 "물속에 있는 거 같아"라고 말하자 동료는 "사우나에 갇힌 것 같아"라고 대꾸했다.
행진 대열 맨 앞에는 영정을 든 아리셀 참사 희생자 가족들이 섰다. 사랑하는 이의 얼굴은 가슴에 꼭 안았지만,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은 가슴에 담기에 너무 커 보였다. 참사의 책임자들이 마음을 다해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다면 그 슬픔이 조금은 덜어지지 않았을까. 그런데 에스코넥·아리셀은 사과는커녕 형사처벌을 면하겠다고 가족들과 개별적으로 합의를 시도했다. 관리감독의 책임이 있는 화성시청은 장례도 치르지 못한 유가족들에 대해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나섰다. 게다가 위로의 말을 골라도 부족할 때 혐오의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사람들까지 있다. 유가족의 슬픔은 분노와 함께 눈물로 흘렀다.
도시를 가득 채운 습기보다 더 숨 막히는 일들을 34일간 버텨 온 유가족들이 파란 리본을 만들어 행진 참가자들에게 나눠주었다. 먼저 떠난 사랑하는 이가 파란 하늘에서 지켜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조그만 리본에 꾹꾹 눌러 담았을 그 마음을 생각하며 가방에 걸려있는 노란 리본과 보라 리본 옆에 매달았다.
걸음을 옮기면서 '이 길을 이렇게 또 걷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2월, 이태원 참사 100일을 앞두고 영정 뒤를 따라 이 길을 걸었다. 그리고 1주기였던 지난 10월에도 걸었고, 눈발이 날리던 올해 1월에는 '이태원 참사 특별법' 공포를 촉구하며 다시 영정을 안고 시청광장 분향소에서 대통령실을 향해 걸었다. 그렇게 피해자들이 걷고 울고 외치면서, 때로는 소리를 삼키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곡기를 끊으며 19개월의 시간을 온몸으로 견디어 간신히 '10·29 이태원참사 피해자 권리 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법'을 만들어냈다.
그런 정치는 없었다
이태원 참사 특별법 제정 후, 정치권에서 들려온 자평을 들으며 부아가 났다. 대통령 거부권 행사 이후 여야가 서로 '양보'해 합의에 이르렀다거나 대통령실 대변인의 "협치의 첫 성과"라는 식의 말이라니.
체감온도 영하 20도가 넘는 혹한에서 밤새도록 1만 5900번의 절을 하는 간절한 마음을 외면했던 대통령과 여당이었다. 합의를 호소하고 눈물을 삼키며 법안을 양보한 유가족들을 지우고 정치인과 대통령의 결단이나 노력으로 이뤄진 것처럼 내놓는 말들이 듣기 싫었다.
여당과 일부 언론은 이태원 참사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두고 참사 초기부터 이때까지 끈질기게 참사를 '정치화/ 정쟁화'한다며 비난했다. '진상규명은 이미 충분하고 특별법도 불필요하다'는 것이 비난의 요지다. 그래서 세월호참사를 소환 하기도 했고, 때로는 유가족을 위하는 양 훈계를 하기도 하고, 사회적 비용을 계산하며 갈등이 벌어질 사회를 걱정하는 체 하기도 했다. 말을 내놓음으로써 일어나지 않을, 또는 일어나 지 않아야 할 일이 발생하는 효과를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정치적 효과'라 할 수 있지 않겠나.
유가족을 위한다면 유가족의 말을 경청하고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할 국가의 역할을 찾아야 할 것이고, 사회적 갈등이 걱정 된다면 어떻게 함께 해결해 나갈지 대안을 만들고 슬픔을 함 께하는 공동체의 마음과 태도를 제안하면 될 일이다. 그런 정 치는 없었다. 국가의 책무를 피하기 위한 정략적인 말만 있었 을 뿐이다.
진상을 규명하고, 재발을 방지하는 대책을 마련하며, 책임을 묻는 것은 참사 피해자의 권리이고 정치·사회 공동체의 의무 이다. 나는 공동체의 의무를 다하는 정치, 피해자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정치, 안전사회로의 전환을 추진하는 정치를 원한다. 그런 정치가 가능하기 위해서 사회적 참사에 대한 정치적 책임, 공동체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진상규명이 필요하다.
진상규명, 시스템의 작동과 국가의 책임까지
이태원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의 요구가 '정쟁화'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국정조사와 수사가 이미 이뤄졌고 책임자에 대한 재판이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사법 절차와 처벌'을 '진상규명'과 동일한 것으로 만들면서 진상규명의 의미를 왜곡하고 오해하게 한다.
진상규명은 2022년 10월 29일 그날의 사실을 찾는데 그치지 않는다. 진상규명은 '무슨 일이 왜, 어떤 문제로 일어났는가'를 밝히는 과정으로, 재난이 발생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또한 생명권을 침해받은 피해자들에게 충분한 지원과 배상 등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 역시 국가의 의무이기에, 재난 이후의 시간을 포함한다.
재난을 예방하기 위한 계획과 실행, 그리고 재난에 대응하고 회복하기까지의 과정은 개인(들)과 시스템이 얽혀 작동한다. 역할이 분배된 기관들끼리 맞물려 돌아가는 통합적인 작용이다. 이 움직임을 개별적으로 쪼개어 매뉴얼과 법령 위반 여부만을 따지게 되면, 시스템의 작동을 포착하는 시선이 희미해질 수 있다.
개별 행위자가 기존의 법령과 규칙과 매뉴얼을 어떻게 위반했는지 밝히는 것은 꼭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책임자들의 역할을 확인하는 것, 이것이 '법적 책임'을 밝히는 과정과는 다른 '구조적 원인 규명'의 의미이고, 우리가 이태원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에 기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상규명은 누구의 책임인가와 함께 국가의 책임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대사회에서의 재난은 이미 사회구조적인 문제이며 그에 대한 국가의 책무는 너무도 당연한 국가의 존재 이유로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재난은 '불운'이 아니라 '부정의'의 문제가 된다. 제도, 관행, 사회적 규범과 가치, 체제 등이 재난에 취약한 계층과 사회 부분을 만들어내고 그들에게 피해를 부정의하게 배분하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부정의를 만들고 유지하게 한 사회·정치·경제적 요인이 어디에 있으며 그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밝혀낼 필요가 있다. 부정의의 책임을 확인해야 재발방지 대책도 제대로 세울 수 있다. 이 부정의의 인정으로부터 피해자의 회복이 시작되고 공동체는 안전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전환이 가능해진다.
행정의 실패, 면죄부 줄 수 없다
우리가 국가에 기대하는 것은 생명과 안전이 위험에 처했을 때 최선을 다해 대응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다. 만약 재난 대응에 실패했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책임지기를 바란다. 그 기대는 늘 무너져 피해자들이 '국가는 없었다'는 절규를 반복하게 했다. 위험에 대비하지 않았고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던 재난 행정이 참사를 만들었는데, 행정안전부 장관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재판정에 선 용산구청장은 권한이 없는데 '적극 행정'을 하지 않은 것은 위법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서울경찰청장은 참사를 전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무죄라는 항변을 했다.
국가의 역할을 맡았던 정부 기관을 이끄는 수장들의 무능이 만든 재난 행정의 실패에 대해 책임을 묻기 위해서 진상규명은 반드시 필요하다. '몰랐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라는 핑계가 더 이상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법적 책임뿐 만 아니라 사회구조적 부정의의 책임을 확정하고 이에 대해 처벌하는 것 역시 생명권을 보호하는 국가의 책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