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닮은 사람[16일의편지-2023년 10월] 언제나 잊지 않고 행동하겠다, 다시금 다짐 –최종진 회원을 만나다

2023-10-16

언제나 잊지 않고 행동하겠다, 다시금 다짐 –최종진 회원을 만나다

2014년 그날의 일은 오전 11시경 운전하며 라디오 뉴스로 접했다. 괜찮겠지, 하는 가벼운 마음이었는데, 두 시간 후 집에서 텔레비전을 켜면서 심각한 상황을 알게 됐다. 절망하고 실망하며 기도밖에 할 수 없는 무력감은 고통으로 밀려왔다. ‘참사가 아닌 학살’이기에 정부에 대한 분노는 점점 커졌다.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슬프다고 그냥 추모만 하고 있을 수 없다, 단 한 명도 구조하지 않은 정권에 대해 강도 높은 투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희생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투쟁하는 것이 민주노총의 몫이자 살아있는 사람들의 책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5월 1일 노동절 민주노총 집회의 기조는 침묵의 추모였다. 그해 11월 민주노총 직선 1기 임원 출마 권유를 받아들인 것도 ‘세월호 분노’가 결정적이었다. 진실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하는데 민주노총이 주도적으로 싸울 수 있도록 역할을 하려는 마음이었다. 임기 동안 내내 박근혜 정권에 맞서 싸웠고, 임기 마지막 날인 2017년 12월 31일에도 보신각 타종 소리를 들으며 광화문 세월호 분향소로 갔고, 목포신항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별이 된 아이들의 영정 앞에서 ‘언제까지나 잊지 않고 행동하겠다’던 약속과 ‘슬픔과 분노를 공유하고 진실을 밝히는 데 앞장서겠다’던 다짐은 오늘로 이어진다. 최종진 회원은 짧지 않은 시간 치열하게 세월호의 시간을 경유해 왔다. 희생자들 가족의 통곡에 함께 울며, 비가 오건 바람이 불건 같이 걸어온 시간이었다.

도보 행진을 하고, 팽목항에 다녀오고, 동조 단식을 하고 추모 집회에 참석하던 2014년. 현장에 교대로 나가 일하는 와중에도 쉬는 날마다 유인물을 나누고, 리본을 만들고, 집회에 참석하며 광장에 ‘올인’했다. 최 회원은 날짜 기억이 비상했는데 지금도 선명하게 떠올리는 여러 날이었다. 어버이날을 하루 앞둔 5월 7일은 ‘카네이션을 달지 않겠습니다’라는 펼침막을 들고 야간행진을 하던 날이다. 세월호 가족들이 진도대교를 넘어 걸어서 청와대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만민공동회를 마친 이들과 함께 세월호 가족들을 마중하러 청운동 주민센터 앞으로 가서 새벽까지 연좌했던 날은 5월 8일이다. 청와대 인근 주민들이 담요와 옷가지를 들고 왔었다. 청와대의 공기는 냉랭하고 밤 기온은 추운 날이었지만, 하나 되는 마음으로 뜨거웠던 날이었다. 8월 한 달 동안엔 매주 토요일 철야로 3,000배 절을 올렸다. 오후 8시쯤 추모 집회 마치고 사람들이 흩어져도 새벽 5시까지 간절함의 절을 올렸다. 땀으로 옷이 다 젖고, 허리가 끊어지는 통증을 느끼면서도 5주 연속으로 빠짐없이 동참했다.

최 회원은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으로 대외연대사업을 도맡아 하며 4.16연대 상임운영위 활동도 했었다. 단원고의 2학년 교실 이전을 반대하며 세월호 가족들이 농성하던 시기 단원고를 찾아가 우연히 마주친 최 회원은 손수건으로 눈을 누르며 울고 있었다. ‘철의 노동자’가 눈물 바람이라니 의외였다. “아빠, 또 운다.” 아들내미가 번번이 하던 말이었다고 들려주었다. 

“울어야지 어떡해? 눈물이 나는 거는. 속상하고 슬픈 뉴스 보면 나도 모르게 우는데.” 

“사람은 다 연결돼 있는 존재잖아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동참하는 마음에 절로 나오는 눈물이니 어쩔 수 없다.

최 회원은 퇴직 후 요즘 가평 쪽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 열심히 4.16 운동에 결합하고 있지 못해서 안타깝지만, 뭐라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하려 한다. 

“세월호 가족들,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전국의 동지들을 생각해서, 한동안 여러 사정으로 비껴갔던 맘을 다시 다잡는 계기로 잡겠습니다.” 

“반드시 진실을 규명하고 책임을 물어야죠.”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앞둔 최 회원의 다시금 다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