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 김 계봉 선생을 만나다
김 계봉 님 인터뷰
김 우
세월호 ‘찐’ 활동가 계봉 님을 만났다. 4.16연대 창립 때부터 회원으로 가입했고, 2017년 운영위원이 된 뒤부터 운영위원회(이하 운영위)에 빠진 적인 한두 번이나 있었을까. 계봉 님에게 운영위는 ‘4.16세월호참사 소식을 깊게 들을 수 있고’ ‘공식적으로 건의할 수 있는’ 귀중한 장이다. “이것 좀 해달라, 저것 좀 해달라. 나 같은 놈도 있어야 4.16연대가 발전하지요.” 운영위 때 가장 발언을 많이 하는 5인방 중에 하나란다.
“그분들 중 두 분이 안 오면 30분이 일찍 끝나는 거죠.^^”
“피해 당사자가 아니니까, 지원하는 역할이니까 절대 나대지 말자고 다짐하는데... 나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열정이 넘치는 거죠.”
뭔가에 꽂히면 참으로 열심히 하는데 ‘세월호참사에 꽂혔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참사 직후엔 그리 열심히 활동하지 않았다. ‘피해자, 정부, 시민단체가 협의해서 잘 마무리되겠지’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마침 시간이 맞아서 참석했던 2015년 광화문광장 추석맞이 행사에서 들은 이야기는 달랐다. “이거는 쉽게 끝날 거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보다 많은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같이 해결하려는 마음이 커져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어려울 것이라 여겨지는 진상규명의 시기를 단축하고 싶었다. 피해자들 뒤에서 힘이 돼주고 싶었다.
광화문노란리본공작소 추모 활동-경복궁 광화문 앞에서
2016년부터 광화문노리공(광화문노란리본공작소)과 세기강양(세월호를기억하는강서양천시민모임)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대부분 엄마인 모임에 가면 왕자가 되겠거니 했다가 머슴으로 살’게 됐으면서도, 안양으로 이사했으면서도 세기강양 활동에 꾸준히 열심히 하는 계봉 님이다.
퇴근 후 ‘광화문에 365일 열어 놓는 공간’인 노리공에 가면 마음이 편해졌다는 계봉 님.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라서, ‘어른으로서의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더는 것’이라서 그랬다. 그 작은 공간에서 낯설지만 뜻을 같이하는 시민들과 어울려 노란 리본을 만드는 것은 일이 아니고 쉼이고 치유였다. 미성년 아이들의 무수한 희생에 부모의 마음으로 가슴 아파하고, 사회가 이 지경이 되도록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자성에서 어른으로 미안해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때론 리본 만드는 것을 기쁘게 양보해야 할 때도 있었다. “박근혜 탄핵 때는 기껏해야 15명 앉을 수 있는 자리에 사람이 미어터졌어요. 당시는 지역에서 올라온 다른 분들이 리본을 만들 수 있도록 지원했어요. 나는 평상시 만드니까요.”
광화문노란리본공작소 추모 활동-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어느 강연회에선가 세월호 부모님이 ‘계봉 쌤 하는 거 보면서 우리도 절대 지치지 말자는 마음을 다잡아요’라는 얘길 했었다. 계봉 님은 ‘만감이 교차’하며 부끄럽기도, 뿌듯하기도, 감사하기도 했다고. 칭찬에 힘을 받는 건 사실이지만 오해하는 사람의 상처 주는 말에도 상심하기보다 그럴수록 분발한다는 계봉 님이다.
“속상한 건 내 마음이죠. 속상하더라도 할 건 해야 한다는 생각이거든요.”
“제 활동의 시한이요? 가족 분들이 이제 고만 해도 될 거 같다고 얘기할 때가 아닐까요? 그런 때가 왔으면 좋겠어요.”
“초심을 잃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지요.”
‘백만 스물하나 에너자이저’ 계봉 님의 동력은 초심에서 나오고, 낙심은 그이의 근처에 얼쩡거리질 못한다. ‘세월호 자체가 많은 사람에게 잊히고, 언론에 잘 나오지 않고, 많은 이가 세월호 곁을 떠나도’ 계봉 님은 ‘악착같이’ 세월호를 잡고 있겠다고 한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것이 상식이라면 ‘좀 비정상적인 사람’이라는 자체 진단이다. 정말 해결되길 원하기에 손쉬운 추측성 주장보다는 객관적인 증거와 자료에 기반한 해결책을 찾고 찾으려 노력할 뿐이다.
“제가 겉보기 등급이 높아요. 어려서부터 고생을 많이 해서요.” 실제 나보다 세 살은 많겠거니 했는데 오히려 세 살이 적은 계봉 님.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과 경기도를 왔다 갔다 하며 살았다. 초등‧중등 시절엔 경북 영양에서 지냈다. 영양으로 갈 때는 시골 아이들이 ‘서울깍쟁이’가 온다고 경계 반 호기심 반이었다는데 계봉 님의 푸근한 외양을 보고는 서울에서 온 것을 의심했다는 일화가 있다. 자라서는 포항에서 고등학교에 다녔고, 대구에서 대학교를 나왔으며, 군 생활은 전주에서 했고, 직장 생활을 시작해 이제껏 사는 곳은 서울이다. 공사 일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서 여기저기 옮겨 살고, 넉넉하지 않은 살림을 경험한 것이 계봉 님의 세상 보는 눈을 키우고 세상을 품는 가슴은 너르게 한 것일까. 대학 입학하면서 ‘그냥 하고 싶어서’ 찾아간 것이 봉사 동아리였고, 아동 보호시설로 다니던 활동을 지금은 후원의 형태로 지속하고 있다. “세상에 아름다운 사람이 참 많죠. 우리네 이웃에 위인 같은 사람들이 정말 많아서 깜짝깜짝 놀라요.” 그이가 한 이야기를 그대로 그이에게 돌려주고 싶다.
계봉 님 직장 근처인 여의도 식당에서 나는 청하, 계봉 님은 맥주 각 일병으로 간소하게 마시며 진행한 인터뷰.
“세월호 활동 길게 하는 것은 그만한 값어치가 있으니까 하는 거예요. 큰 역할보다 길게 갈 수 있는 활동을 하고 싶어요. 금방 끝날 거 같지 않거든요. 느낌상.”
“오늘 울지 말자고 다짐하고 나왔어요. 진실을 얘기하다 보면 울어버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묻자 “앞으로 열심히 세월호 활동 하겠습니다~”라고 답하는 계봉 님. 계봉 님은 인터뷰하는 동안 다짐대로 울지 않았다. 난 그이의 촉촉해지던 눈가, 붉어지던 눈시울을 보았다는 말 대신 다만 붉은 한 조각 간절한 마음을 보았다는 얘기만 하겠다. ‘진심 김 계봉 선생’을 만났다.

광화문노란리본공작소 철거 날에 김 계봉 님
진심 김 계봉 선생을 만나다
김 계봉 님 인터뷰
김 우
세월호 ‘찐’ 활동가 계봉 님을 만났다. 4.16연대 창립 때부터 회원으로 가입했고, 2017년 운영위원이 된 뒤부터 운영위원회(이하 운영위)에 빠진 적인 한두 번이나 있었을까. 계봉 님에게 운영위는 ‘4.16세월호참사 소식을 깊게 들을 수 있고’ ‘공식적으로 건의할 수 있는’ 귀중한 장이다. “이것 좀 해달라, 저것 좀 해달라. 나 같은 놈도 있어야 4.16연대가 발전하지요.” 운영위 때 가장 발언을 많이 하는 5인방 중에 하나란다.
“그분들 중 두 분이 안 오면 30분이 일찍 끝나는 거죠.^^”
“피해 당사자가 아니니까, 지원하는 역할이니까 절대 나대지 말자고 다짐하는데... 나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열정이 넘치는 거죠.”
뭔가에 꽂히면 참으로 열심히 하는데 ‘세월호참사에 꽂혔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참사 직후엔 그리 열심히 활동하지 않았다. ‘피해자, 정부, 시민단체가 협의해서 잘 마무리되겠지’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마침 시간이 맞아서 참석했던 2015년 광화문광장 추석맞이 행사에서 들은 이야기는 달랐다. “이거는 쉽게 끝날 거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보다 많은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같이 해결하려는 마음이 커져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어려울 것이라 여겨지는 진상규명의 시기를 단축하고 싶었다. 피해자들 뒤에서 힘이 돼주고 싶었다.
2016년부터 광화문노리공(광화문노란리본공작소)과 세기강양(세월호를기억하는강서양천시민모임)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대부분 엄마인 모임에 가면 왕자가 되겠거니 했다가 머슴으로 살’게 됐으면서도, 안양으로 이사했으면서도 세기강양 활동에 꾸준히 열심히 하는 계봉 님이다.
퇴근 후 ‘광화문에 365일 열어 놓는 공간’인 노리공에 가면 마음이 편해졌다는 계봉 님.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라서, ‘어른으로서의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더는 것’이라서 그랬다. 그 작은 공간에서 낯설지만 뜻을 같이하는 시민들과 어울려 노란 리본을 만드는 것은 일이 아니고 쉼이고 치유였다. 미성년 아이들의 무수한 희생에 부모의 마음으로 가슴 아파하고, 사회가 이 지경이 되도록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자성에서 어른으로 미안해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때론 리본 만드는 것을 기쁘게 양보해야 할 때도 있었다. “박근혜 탄핵 때는 기껏해야 15명 앉을 수 있는 자리에 사람이 미어터졌어요. 당시는 지역에서 올라온 다른 분들이 리본을 만들 수 있도록 지원했어요. 나는 평상시 만드니까요.”
어느 강연회에선가 세월호 부모님이 ‘계봉 쌤 하는 거 보면서 우리도 절대 지치지 말자는 마음을 다잡아요’라는 얘길 했었다. 계봉 님은 ‘만감이 교차’하며 부끄럽기도, 뿌듯하기도, 감사하기도 했다고. 칭찬에 힘을 받는 건 사실이지만 오해하는 사람의 상처 주는 말에도 상심하기보다 그럴수록 분발한다는 계봉 님이다.
“속상한 건 내 마음이죠. 속상하더라도 할 건 해야 한다는 생각이거든요.”
“제 활동의 시한이요? 가족 분들이 이제 고만 해도 될 거 같다고 얘기할 때가 아닐까요? 그런 때가 왔으면 좋겠어요.”
“초심을 잃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지요.”
‘백만 스물하나 에너자이저’ 계봉 님의 동력은 초심에서 나오고, 낙심은 그이의 근처에 얼쩡거리질 못한다. ‘세월호 자체가 많은 사람에게 잊히고, 언론에 잘 나오지 않고, 많은 이가 세월호 곁을 떠나도’ 계봉 님은 ‘악착같이’ 세월호를 잡고 있겠다고 한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것이 상식이라면 ‘좀 비정상적인 사람’이라는 자체 진단이다. 정말 해결되길 원하기에 손쉬운 추측성 주장보다는 객관적인 증거와 자료에 기반한 해결책을 찾고 찾으려 노력할 뿐이다.
“제가 겉보기 등급이 높아요. 어려서부터 고생을 많이 해서요.” 실제 나보다 세 살은 많겠거니 했는데 오히려 세 살이 적은 계봉 님.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과 경기도를 왔다 갔다 하며 살았다. 초등‧중등 시절엔 경북 영양에서 지냈다. 영양으로 갈 때는 시골 아이들이 ‘서울깍쟁이’가 온다고 경계 반 호기심 반이었다는데 계봉 님의 푸근한 외양을 보고는 서울에서 온 것을 의심했다는 일화가 있다. 자라서는 포항에서 고등학교에 다녔고, 대구에서 대학교를 나왔으며, 군 생활은 전주에서 했고, 직장 생활을 시작해 이제껏 사는 곳은 서울이다. 공사 일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서 여기저기 옮겨 살고, 넉넉하지 않은 살림을 경험한 것이 계봉 님의 세상 보는 눈을 키우고 세상을 품는 가슴은 너르게 한 것일까. 대학 입학하면서 ‘그냥 하고 싶어서’ 찾아간 것이 봉사 동아리였고, 아동 보호시설로 다니던 활동을 지금은 후원의 형태로 지속하고 있다. “세상에 아름다운 사람이 참 많죠. 우리네 이웃에 위인 같은 사람들이 정말 많아서 깜짝깜짝 놀라요.” 그이가 한 이야기를 그대로 그이에게 돌려주고 싶다.
계봉 님 직장 근처인 여의도 식당에서 나는 청하, 계봉 님은 맥주 각 일병으로 간소하게 마시며 진행한 인터뷰.
“세월호 활동 길게 하는 것은 그만한 값어치가 있으니까 하는 거예요. 큰 역할보다 길게 갈 수 있는 활동을 하고 싶어요. 금방 끝날 거 같지 않거든요. 느낌상.”
“오늘 울지 말자고 다짐하고 나왔어요. 진실을 얘기하다 보면 울어버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묻자 “앞으로 열심히 세월호 활동 하겠습니다~”라고 답하는 계봉 님. 계봉 님은 인터뷰하는 동안 다짐대로 울지 않았다. 난 그이의 촉촉해지던 눈가, 붉어지던 눈시울을 보았다는 말 대신 다만 붉은 한 조각 간절한 마음을 보았다는 얘기만 하겠다. ‘진심 김 계봉 선생’을 만났다.
광화문노란리본공작소 철거 날에 김 계봉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