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닮은 사람[16일의편지-2023년 4월]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그대-4.16가족협의회 추모부서장 호성이 어머니

2023-04-14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그대-4.16가족협의회 추모부서장 호성이 어머니

김 우 

자정 가까운 시간 4.16가족협의회 추모부서장 호성이 엄마랑 심야 통화를 했다. 4.16연대 안전사회위원회 회의에서 만나 인터뷰하려다가 여의찮아 한밤의 전화 데이트로 오붓하게 진행하자던 약속이었다.

오늘 호성이 방 촬영을 했다고 한다. 내일인 14일 저녁 <에스비에스> 뉴스에 방영될 거란다. 호성이 방엔 49재 때 태워주고 남긴 물건과 세월호 관련 책들이 있단다. 진열해 놓은 아이언맨 모형 등에는 ‘애하고 많이 놀아주지 못했다고’ ‘아이가 좋아했다고’ 생각해서 아이가 떠난 뒤에라도 아이에게 선물해주고 싶은 아빠의 마음이 담겼다.

세월호 참사 9주기를 앞두고 호성이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호성이는 뭘 좋아했을까. 바로 엄마가 해주는 음식이었다. 청국장, 김치찌개, 불고기, 제육볶음, 계란말이, 스파게티,... 

“엄마 지금 속이 느끼해. 밥 먹어야겠어.”

“넌 왜 그러니, 아빠하고 닮았다. 여자들 그런 거 되게 싫어해.”

번번이 밖에서 충분히 먹고 들어오지 않고 집에서 또 차려달라고 해서 짜증이 날 정도였다. 

호성이가 집에서 밥을 많이 먹었다고 하니까 먹성 좋았다던 호성이 엄마 어린 시절 얘기가 떠올랐다. 호성이 엄마는 네 딸 중 막내였다. 없는 집에 덩치 큰 딸내미로 태어나서는 어린 나이에도 밥을 많이 먹었다. 아니 많이 먹고 싶었지만, 양껏 먹어보질 못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서 아버지 얼굴을 몰랐고, 어머니는 방물장수처럼 이 마을 저 마을 돈 벌러 다녀서 얼굴 보기 힘들었다. 열두 살 터울의 큰언니와 아홉 살 차이 나는 둘째 언니는 부산에서 공장 생활을 했다. 며느리와 손녀는 구박하되, 한 마을 살던 고모네 아들은 편애하던 할머니와 때리기도 많이 했지만, 엄마 노릇 해주며 귀도 잘 파주던 네 살 많은 셋째 언니와 지냈다. 

할머니가 한겨울 대보름 무렵이면 밤새 촛불 켜고 그 앞에 주먹밥을 놓아두곤 했다. 남아선호 사상 투철한 할머니였지만 타지 나간 두 손녀의 한해 건강을 기원하는 바람이었다. 대여섯 살 먹었던 호성이 엄마는 하얀 밥을 김으로 말아 참외보다 더 크게 빚어놓은 주먹밥을 날름 먹어버리고 할머니에게 맞던 기억이 있다. 어린 호성이 엄마는 ‘배고파서 먹었는데 왜 혼낼까?’ 심정이었다.

“나 잊어버리고 우리 아들한테 그랬네.”

‘보리 삶아 선반 위에 올려놓으면 주워 먹고. 먹다 보면 다 먹어버리고’ 하던 호성이 엄마가, 그래도 배불리 먹은 기억이 없어 허전한 기억의 호성이 엄마가, 먹는 거에 서러움 있던 호성이 엄마가 집밥을 많이 먹던 호성이에게 짜증 낸 이야기를 하다가 후회한다. 호성이 엄마가 떠난 호성이를 두고 하는 후회는 또 무얼까. 

아침에 밥 먹고, 엄지손가락 척 올리고, 신발 신고, 거울 한 번 보고, “갔다 올게” 인사하던 호성이. 그런 호성이에게 피곤하다고, 오늘은 그냥 가라고, 뭐라도 사 먹으라고 했던 날이 있었다. 그런 날 배고픔의 얼굴을 하고 가던 호성이에게 미안하다. 

“내 방식으로 돈 같은 것도 교육 시킨 게 미안해.” 필요한 거 미리 사주지 못하고, 호성이가 심부름하며 용돈 모아서 “이거 보태서 저거 사주세요.” 할 때도 “머리에 들은 게 많아야지. 옷 같은 물질적인 거에 욕심부리면 안 돼.” 하면서 ‘구질구질하게 살아서’ 그렇게 보내서 너무 속상하다. 이쁘고 특이하게 자른 머리도 노는 아이처럼 잘랐으니 다시 자르고 오라고 돌려보냈던 것도 맘에 상처가 됐을까 봐 미안하다.

“아이가 잘못하지만 않은 거 같은데 내가 화가 났는지 아이를 한번 때린 적이 있어요. 이유는 생각나지 않고 손찌검한 것만 가슴에 남았어요.” 나가라고 했더니 집 앞 초등학교 시소인가 그네에 맥없이 앉아있던 모습도 마음에 걸리고, 내 삶의 짜증을 아이에게 부린 것들로 마음이 아프다는 호성이 엄마다. 잔잔한 사랑 주지 못하고 엄하게만 키웠는데, 잘못했다는 사과를 받아줄 호성이가 이제는 없다는 게 가장 마음 아프다.

호성이 엄마는 엄하게만 키웠다고 말하지만, 얘기를 들으며 더없이 다정한 모자를 보았다. “언니들 옷을 물려받는 게 싫었어. 체격 크다고 아가씨 옷을 애한테 입히고, 남자 중학생 가방 누가 가져온 거 물려받고.” 호성이 엄마는 ‘선머스마’로 씩씩하게 컸지만, 어머니의 사랑은 느끼지 못했다. 아이를 낳고서야 ‘애린 마음’을 알았다. 둥지가 만들어진 거 같았고, 뿌리와 가지가 단단해진 거 같았다. 짝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었다. 애틋한 연애를 하는 마음이었다.

운동 잘하고 건들건들 걸음걸이로 껄렁해 보이는 인상이지만, 겁 많고 순하고 착한 호성이. 딸내미 같은 아들이었던 호성이는 대화하길 좋아했다. 들어주는 것도, 이야기하는 것도 좋아하고 물어봐 주는 것도 잘했다. 오늘 어땠어? 너는 무슨 일 있었니? 호성이와 이불 속에서 그런 얘길 속닥속닥하고 있으면 호성이 아빠가 방문을 열고는 “둘이 뭐해?” 질투했다. 설거지하는 곁에 호성이가 오면 호성이 엄마는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그대’ 노래를 부르곤 했다. 호성이 아빠가 질투할까 봐 둘이 있을 때만 부르는 노래였다.

“엄마, 나 어떻게 생각해?”

“공기지. 공기 없으면 어떻게 사니?”

호성이라는 이름은, 사는 아파트에서 지금도 내려다보이는 작명소에서 지었다. 애가 골고루 타고났는데 생명줄이 짧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 말을 들어서겠지만 호성이가 늦게 들어와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상이었다. 호성이가 그런 엄마의 심정을 알고 전화를 자주 했지만, 혹여 전화가 없을 때면 여지없이 불안했다. “나한테는 너무나 보석 같은 아인데 깨질까 봐 불안”했던 호성이가 그렇게 떠난 뒤 호성이 엄마는 몸이 매우 아프다. “아이 보내놓고 당연한 거지.” 간수치는 점점 올라가고, “아이를 보내놓고 하도 울었더니 눈이 시려서, 지금까지 시려서” 백내장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안압을 낮춰야 그나마 수술이라도 받을 수 있다. 

호성이는 이제 호성이 엄마가 무얼 하면 좋아할까? 립스틱이라도 바르면 예쁘다고 말해주던 호성이, 환한 색깔 옷 좀 입으라던 호성이, 힘 좀 그만 쓰고 약해 보이게 해서 도움도 받으라던 호성이. 그런 호성이니까 엄마가 ‘예쁘게 화장하고 밝은 옷 입고 건강 챙기고 징징거리지 않으면’ 좋아할 거 같단다. 

특이한 옷차림으로 동네 패셔니스타 소리를 듣는 내가 호성이 엄마에게 약속했다. 세월호 참사 9주기 기억식 때 내 옷장에서 호성이 엄마에게 줄 화사한 옷을 골라 가져가겠다고 했다. 호성이 엄마는 호성이 방에 들어가서 입은 모습을 호성이에게 보여주고 인증사진을 보내기로 했다. 전화를 끊고 바로 옷장으로 가서 나비 날개처럼 하늘하늘한 시스루를 택했다. 초기엔 앞뒤 안 보고 추진하며 분노의 힘으로 달려왔다면 이제 생명안전공원은 어떠해야 하는지 등의 전문성도 익히며 차분하게 걸어가 보겠다는 호성이 엄마. 긴 싸움에 지치지 않는 투지의 전사에게 권하는 봄날의 전투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