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닮은 사람[16일의 편지-2025년 1월] 운동 총량의 법칙 구현자_일수 님

2025-01-16

운동 총량의 법칙 구현자

일수 님 인터뷰

김 우


“전에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까막눈이었죠. 세월호로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했죠.” 

“저도 똑같은 세대로 아이들 키우고 부모님과 연령도 같고 동질성 느껴서 그런 거죠.”

세월호 활동가 중에는 학생운동도 사회운동도 전무했던 사람이 왕왕 있다. 운동 총량의 법칙이라도 있다는 듯 세월호참사 이전에 하지 못한 운동을 세월호참사 이후에 전력을 다해 꾸준히 펼치는 경우 말이다. 김일수 회원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일수 님에게 세월호 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물었더니 2015년 2월부터 6월까지 111일간 진행한 세월호 삼보일배 순례단 활동을 떠올렸다. 진도 팽목항에서 광화문 광장까지 일정 중 일수 님은 주 1~2회 참여를 했다. 기계실에서 주야 교대로 일을 하며 잠잘 시간에 결합한 것이었다. 24시간 야근하고 사흘을 쉬던 때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삼보일배에 참가하곤 실신을 하기도 했다. 그러고도 다음날엔 1박 2일 도보 행진에 결합하고, 그 다음날엔 안산 호수 마라톤에 세월호 미수습자 티셔츠를 입고 참가해서 완주했다. 다시 도보 행진단에 합류하고, 기자회견 마무리까지 한 뒤에 다음 날 오전 출근을 위해 야간버스를 탔다. “새벽 3시에 도착해선 집에 와서 세수하는데 쌍코피가 주르륵 나더라고요.” 

“미수습자 수습과 세월호 인양을 위해서 뛰었어요.” 2015년~2017년 광주 15회, 안산 15회, 서울 15회 등 전국 마라톤에도 총 88회 참여했다. 세월호 노란 티셔츠를 입고 뛰고 또 뛰던 시간이었다. 전국 활동 지역도 한두 번은 모두 가보려 노력했고, 빠트리지 않고 가봤다고 생각한다. 같이 피켓 들고 함께 리본을 만드는, 일수 님의 전국을 누비는 발걸음은 현재 진행형이다. 서울시의회 앞 기억공간을 지키는 활동은 물론 매월 셋째 주 토요일 안산 기억저장소를 찾는 일도 빼먹지 않는다. 기억교실에 매월 가는 이유를 물었더니 ‘우리 애 보러 가는 것처럼 간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랬다, 희생자와 피해자에 대한 공감을 넘어서 우리의 일, 바로 나의 일로 받아 안은 것이 꾸준한 활동의 근원이었다.

일수 님은 이제 세월호 활동을 넘어 김용균재단의 회원이기도 하고,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활동도 하고 있다. 아픔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간다. 미선이와 효순이를 추모하러 양주에도 세 차례나 찾아갔다. 얼마 전엔 무안공항에서 5일 동안 자원봉사를 하기도 했다. ‘타지로 다니며 넓고 멀리 활동’한다는 자부심이 크다.

일수 님은 광주의 ‘이런저런’ 행사에도 자주 참여한다. 광주는 현 거주지이기도 하지만 담양이 고향인 일수 님이 유학을 나와 고교 시절 3년 동안 자취를 한 고장이기도 하다. 고교 1학년이던 81년에도 학교 앞으로 기갑 부대가 왔다 갔다 하는 가운데 친구들에게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전해 들었다. “전국 팔도를 돌아다녀 봤는데 광주가 제일 사람이 착해요. 착하고 포근하고 품성이 다른 거 같아요.” 길 하나를 물어도 친절하고, 음식만 해도 양을 많이 주고 값도 싼 데다 전국 제일의 맛이라고 추켜올린다. 일수 님의 삶에 80년 빛고을 광주는, 찔리고 총에 맞고 장갑차에 뭉개지던 희생의 광주는, 압제에 인간 정신으로 일어서던 저항의 광주는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적지 않은 영향을 준 것은 틀림이 없는 듯하다.

일수 님은 작년 말 조경 일에서 정년퇴직했고, 다음 주 다시 다른 곳에 조경 관리 일을 신청할 예정이다. ‘노는 걸 싫어하는 성질’이라서 그렇단다. 새해 계획을 물었더니 ‘이 상태를 쭉 유지’하는 거라고 답한다. “직장을 빨리 잡아서 그것에 맞게 여타의 활동을 이어 나가려 해요.” 재작년부터 치매가 심해지는 어머니 간병까지 겹쳐서 일상이 힘들 법한데, 사회대개혁 궐기대회까지 참석해선 4.16연대와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의 부스를 지키곤 한다. 광주에서 용산까지 기찻삯이 46,800원. 인터뷰어와 함께 먹으려고 광주 식당에서 사 온 김밥 2줄이 7,000원. 당일치기 서울행 비용이 부담스러울 법도 하다. 돌아갈 땐 기차보다 조금 더 저렴한 버스를 이용하고, 늦은 저녁은 집에 가서 먹을 생각이란다.

고등학교 때 ‘놀았다’기에 어떻게 놀았나 들여다봤더니 오락실에서 갤러그하고, 영화 보러 다닌 게 전부인 일수 님. 고교 졸업 후 타이어 공장 압출반에서 일하다가 입대했고, 군 생활하던 스물셋의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삼 형제 중 맏이로 동생들이 대학을 모두 졸업한 뒤에야 스물하고도 일곱 살의 나이에 대학에 진학해선 ‘잠 안 자고 리포트 쓰며’ 장학생으로 다녔다. 열심과 성실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일수 님에게 좌우명을 물었더니 따로 좌우명은 없단다. “세금 잘 내고, 사건 안 치고, 평범하게 사는 거예요. 대신 남을 도와가며 아픔도 같이 공감하는 활동도 좀 해보고 싶어요.” 그저 선한 일수 님의 ‘평범한’ 바람대로 ‘생명안전공원이 조속히 건설되고, 세월호의 진상이 낱낱이 규명되고, 책임질 사람이 응분의 책임을 지는’ 그런 나라를, 새로운 세상을 나도 꿈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