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 못 할 거 같아" -김현석 회원 인터뷰
김 우
지역협력위원회 위원장인 김현석 회원을 만났다. 작년에 이어 연임 중인데 가협 2명, 지역 6명이던 위원회에 올해는 지역 3곳이 더 참여한다.
“어떻게 늘렸어요?”
“일일이 쫓아다니면서 설득해서 늘렸지.”
역시나 끈질김이 비결이었다. 김 회원은 4.16약속지킴이도봉모임(이하 도봉모임)의 대표를 맡고 있기도 하다. 공모사업에 응모하려고 비영리단체로 사업자등록증 내느라 맡은 직함이다. 하지만 재작년 4.16재단의 공모사업에 선정된 뒤 기쁨은 잠시였고,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이제는 안 하려고 한다.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결산하는데 붙박이 전담자가 있지 않은 구조로는 벅차도 너무 벅차더라는 이야기다.
“따로 전담자가 없는데 그걸 다 누가 했어요?”
“나랑 경숙쌤이 했지.”
역시나 도봉모임 두 역군의 헌신이었다.
도봉모임은 매주 금요일마다 저녁 7시 창동역 1번 출구에서 ‘여전히’ 실천전을 하고 있다. 세월호 가족들과 연초엔 연탄 나눔, 연말엔 김장 나눔을 ‘꾸준히’ 해온 지도 각 7년과 4년이다. 매월 소식지를 발간해 SNS로 지역의 밴드나 카톡방 등에 뿌리고도 있다.
“공은 들어가는데 피드백은 있나요?”
“댓글 달리는 정도. 수고하셨습니다. 그 정도.”
에이포 용지 7~8장 분량의 내용물을 혼자서 만드는 작업의 지속 여부는 고민이 필요한 듯 보였다. 가족들의 활동도 줄어드는 모습이 보이고, 지역 동력들도 떨어지는 모양새라 여러 안타까움이 든다고. 제주 같은 경우는 학생들 위주의 새로운 모습으로 활력을 찾아가는 터라 고무적이라 생각한다.
김 회원은 올해 두 가지 큰바람이 있다. 하나는 팽목항이 제주 가는 페리호의 경유지가 돼서 기억관은 그냥 주차장처럼 방치된 상황에 기억관을 기억관답게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다. 매월 첫째 주 주말마다 ‘팽목바람길’을 열며 1박 2일로 팽목 지킴이를 하는 이들과 주중에 내려와 지킴이를 하는 세월호 가족의 노력을 지역협력위원장으로 받아안아 대책을 세우고 싶다는 마음이다. 다른 하나는 안산의 4.16 생명안전공원이 첫 삽을 뜰 수 있길 바라는 간절함이다.
이태원 참사가 일어나고 두 달 만에 분향소를 찾았다. 해가 넘어가기 전에는 가야지 하는 생각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는데 그전까지 못 간 이유가 있었다. ‘영령들에게 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 무슨 얼굴을 들고 찾아갈 수 있나’ 하는 죄스러움이었다. 세월호 참사가 난 뒤 9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2023년에 서울 한복판에서 버젓이 일어난 참사. ‘그동안 나는 무슨 싸움을 한 거지?’라는 자괴감도 컸다.
“정확히 나이는 모르겠지만 사진을 보면 2016년 살았던 애들이 성장해서 이태원 참사를 당한. 그런 연상이 되면서 너무 슬픈 거야.”
포스트잇 메모 중 잊히지 않는 문구가 있었다. ‘세월호 참사 때 친구를 잃었고, 이제 또 남은 친구를 잃어서 나는 친구가 없다.’
“기성세대로 할 얘기가 없고, ‘더 이상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내가 뭘 할게’라는 약속조차 어려운 무기력증 같은 걸 많이 느꼈지.”
하지만 이태원 참사 이후 도봉모임 금요 실천의 참가자나 서명하는 사람이 오히려 늘었다. 이태원 참사의 유가족도 세월호 가족의 도움을 절실히 원하고 있기도 하다. 어떻게 싸워왔는지 듣고 싶고, 어떻게 조직을 만들고 어떻게 지역에서 함께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 한다.
“주춤주춤했던 건 부담감과 짐으로 남겨두고 이제는 연대할 방법을 찾고 있어.”
64년생으로 올해 60세인 김 회원. 대학 1학년 때 광주 백서를 보고, 광주 출신 동기의 이야기를 들으며 충격적인 진실을 접한 뒤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 학생운동도 하고, 감옥에도 가고, 공단에도 들어가고, 그리고 지금 이렇게 질기고도 질기게 세월호 운동을 하며 일관된 삶을 살고 있다. 김 회원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10주기까지는 가봐야지, 절대로.”
2년 후를 어떻게 알겠냐는 말에, 불투명한 내일을 알 수 없다는 말에, 그이도 10주기 이후엔 할 만큼 했다는 생각으로 ‘일상’으로 돌아가 살아가게 될까 했는데 이어지는 답변은 이러했다.
“정년퇴직하지 않을까. 스스로 놓든지. 그러면 그다음은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지금은 짬 내서 하고 주말에만 하는데 다른 접근으로 하지 않을까.”
더 치열해지고 더 지독해지겠다는 말이었다.
“이거는 포기 못 할 거 같아. 이거마저 포기하면 내 인생에 오로지 나로서 산 건 하나도 없는 거 같아.”
시대의 사명이었을까, 감옥에 가고 공장에 투신을 한 게 오롯이 나만의 생각이었나 물음표를 찍지만 지금 세월호 운동을 하는 것은 오롯이 자기 생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김 회원. 그이의 활약상은 아직 펼쳐지지도 않은 것이었다. 이제 재시작이고 더 본격화될 활동이었다.
"포기 못 할 거 같아" -김현석 회원 인터뷰
김 우
지역협력위원회 위원장인 김현석 회원을 만났다. 작년에 이어 연임 중인데 가협 2명, 지역 6명이던 위원회에 올해는 지역 3곳이 더 참여한다.
“어떻게 늘렸어요?”
“일일이 쫓아다니면서 설득해서 늘렸지.”
역시나 끈질김이 비결이었다. 김 회원은 4.16약속지킴이도봉모임(이하 도봉모임)의 대표를 맡고 있기도 하다. 공모사업에 응모하려고 비영리단체로 사업자등록증 내느라 맡은 직함이다. 하지만 재작년 4.16재단의 공모사업에 선정된 뒤 기쁨은 잠시였고,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이제는 안 하려고 한다.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결산하는데 붙박이 전담자가 있지 않은 구조로는 벅차도 너무 벅차더라는 이야기다.
“따로 전담자가 없는데 그걸 다 누가 했어요?”
“나랑 경숙쌤이 했지.”
역시나 도봉모임 두 역군의 헌신이었다.
도봉모임은 매주 금요일마다 저녁 7시 창동역 1번 출구에서 ‘여전히’ 실천전을 하고 있다. 세월호 가족들과 연초엔 연탄 나눔, 연말엔 김장 나눔을 ‘꾸준히’ 해온 지도 각 7년과 4년이다. 매월 소식지를 발간해 SNS로 지역의 밴드나 카톡방 등에 뿌리고도 있다.
“공은 들어가는데 피드백은 있나요?”
“댓글 달리는 정도. 수고하셨습니다. 그 정도.”
에이포 용지 7~8장 분량의 내용물을 혼자서 만드는 작업의 지속 여부는 고민이 필요한 듯 보였다. 가족들의 활동도 줄어드는 모습이 보이고, 지역 동력들도 떨어지는 모양새라 여러 안타까움이 든다고. 제주 같은 경우는 학생들 위주의 새로운 모습으로 활력을 찾아가는 터라 고무적이라 생각한다.
김 회원은 올해 두 가지 큰바람이 있다. 하나는 팽목항이 제주 가는 페리호의 경유지가 돼서 기억관은 그냥 주차장처럼 방치된 상황에 기억관을 기억관답게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다. 매월 첫째 주 주말마다 ‘팽목바람길’을 열며 1박 2일로 팽목 지킴이를 하는 이들과 주중에 내려와 지킴이를 하는 세월호 가족의 노력을 지역협력위원장으로 받아안아 대책을 세우고 싶다는 마음이다. 다른 하나는 안산의 4.16 생명안전공원이 첫 삽을 뜰 수 있길 바라는 간절함이다.
이태원 참사가 일어나고 두 달 만에 분향소를 찾았다. 해가 넘어가기 전에는 가야지 하는 생각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는데 그전까지 못 간 이유가 있었다. ‘영령들에게 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 무슨 얼굴을 들고 찾아갈 수 있나’ 하는 죄스러움이었다. 세월호 참사가 난 뒤 9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2023년에 서울 한복판에서 버젓이 일어난 참사. ‘그동안 나는 무슨 싸움을 한 거지?’라는 자괴감도 컸다.
“정확히 나이는 모르겠지만 사진을 보면 2016년 살았던 애들이 성장해서 이태원 참사를 당한. 그런 연상이 되면서 너무 슬픈 거야.”
포스트잇 메모 중 잊히지 않는 문구가 있었다. ‘세월호 참사 때 친구를 잃었고, 이제 또 남은 친구를 잃어서 나는 친구가 없다.’
“기성세대로 할 얘기가 없고, ‘더 이상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내가 뭘 할게’라는 약속조차 어려운 무기력증 같은 걸 많이 느꼈지.”
하지만 이태원 참사 이후 도봉모임 금요 실천의 참가자나 서명하는 사람이 오히려 늘었다. 이태원 참사의 유가족도 세월호 가족의 도움을 절실히 원하고 있기도 하다. 어떻게 싸워왔는지 듣고 싶고, 어떻게 조직을 만들고 어떻게 지역에서 함께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 한다.
“주춤주춤했던 건 부담감과 짐으로 남겨두고 이제는 연대할 방법을 찾고 있어.”
64년생으로 올해 60세인 김 회원. 대학 1학년 때 광주 백서를 보고, 광주 출신 동기의 이야기를 들으며 충격적인 진실을 접한 뒤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 학생운동도 하고, 감옥에도 가고, 공단에도 들어가고, 그리고 지금 이렇게 질기고도 질기게 세월호 운동을 하며 일관된 삶을 살고 있다. 김 회원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10주기까지는 가봐야지, 절대로.”
2년 후를 어떻게 알겠냐는 말에, 불투명한 내일을 알 수 없다는 말에, 그이도 10주기 이후엔 할 만큼 했다는 생각으로 ‘일상’으로 돌아가 살아가게 될까 했는데 이어지는 답변은 이러했다.
“정년퇴직하지 않을까. 스스로 놓든지. 그러면 그다음은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지금은 짬 내서 하고 주말에만 하는데 다른 접근으로 하지 않을까.”
더 치열해지고 더 지독해지겠다는 말이었다.
“이거는 포기 못 할 거 같아. 이거마저 포기하면 내 인생에 오로지 나로서 산 건 하나도 없는 거 같아.”
시대의 사명이었을까, 감옥에 가고 공장에 투신을 한 게 오롯이 나만의 생각이었나 물음표를 찍지만 지금 세월호 운동을 하는 것은 오롯이 자기 생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김 회원. 그이의 활약상은 아직 펼쳐지지도 않은 것이었다. 이제 재시작이고 더 본격화될 활동이었다.